금산사창업연록(金山寺創業宴錄)

사장백전지(詞場白戰誌)

용문몽유록(龍門夢遊錄)


<금산사창업연록(金山寺創業宴錄)>

낙저 이주천(洛渚 李柱天:1662.08~1711.03.13) 著

 

제1회 동아세아 우언연구 국제회의

주최 : 한국우언문학회, 동아세아비교문화 국제회의 한국본부

일시 : 2005년 2월 25일(금)~26일(토)

장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제2분과 발표논문

金山寺夢遊錄의 創作寓意와 原作者論


金侖秀(社團法人 仁山學硏究院 院長)


1. 洛渚遺稿와 金山寺創業宴錄

2. 洛渚 李柱天의 生涯와 官歷

3. 金山寺創業宴錄과 金山寺夢遊錄

4. 金山寺創業宴錄의 創作 寓意


1. 洛渚遺稿와 金山寺創業宴錄


  1991년 간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낙저유고》 항목이 동국대학교 법대 한여우의 해설로 실려 있다. 대충 옮기면 다음과 같다.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洛渚 이주천(1662~1710)의 시문집으로 내편 5권 2책, 외편 2책으로 필사본이다.

  이 책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집, 필사 경위를 알 수 없다. 내편은 일반적인 문집 형태로 되어 있으며 권1에 시 113수, 권2에 辭 5(2)편, 賦 4(3)편, 상량문 2편, 奏 3(2)편, 箋 1편, 권3에 논·설·책제 각 1편, 해 3편, 錄 2편, 呈文·事實 각 1편, 권 4에 記 6편, 序 5편, 祭文 2편, 奉安文 1편, 묘지명·가장·묘표 각 1편, 권5에 찬 9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외편 상책에는 <금산사창업연록>과 잡저 9편, 하책에는 <신증황극내편>, <신증태현경>, <신증팔진도>, <斷時占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금산사창업연록>은 역사의 치란을 당시의 영웅호걸의 입을 빌려서 말하게 한 일종의 교훈적 소설이다. 그 발문에서 후대의 임금과 신하들을 경계하려고 지었다고 밝혔는데, 그 형태와 구성면에서 소설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잡저 9편도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여 꾸민 이야기인데 각각 단편소설적 성격이 강하다.

  경상북도 칠곡군 이우목이 소장하고 있다.

  저자의 본관은 벽진, 호는 낙저, 아버지는 통덕랑 해발이며 어머니는 풍양조씨로 참판 여수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한림원에 들어가 시강원사서와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이상이 그 해설의 대강이다. 이상의 해설에서 빠진 것은 낙저 이주천(1662~1711)이 문과에 급제한 것과 처부가 탄옹 권시의 장남 무수옹 권기인 사실이고 틀린 것은 낙저의 별세 연대이다. 1710년이 아니고 1711년(숙종 37년 3월 13일)이다.

  여기에 소개된 <금산사창업연록>이 한국한문소설사에 유명한 <금산사몽유록> 또는 <금화사몽유록>의 원작이다. 그런데 한여우의 해설에는 그 내용이나 상관성을 언급하지 않아 <금산(화)사몽유록>의 중요한 원류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말았다.

  단편소설적 성격이 강한 잡저 9편의 제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데 다만 이것은 <詞場白戰誌>라는 1편의 소설의 목차이다. 심의의 <대관재몽기>와 같은 문장왕국을 건설하고 文林(국호 先秦, 국왕 사마천), 騷壇(국호 大楚, 국왕 굴원), 詩城(국호 盛唐, 국왕 조식)의 삼국으로 갈린 왕국의 통일을 묘사한 장편 우언소설이다.

詞場白戰誌

1.淮南子獨當三將

2.兎園賦雪推相如

3.龍門奪袍歸李白

4.李斯大戰司馬遷

5.屈平大戰樂賓王

6.五國大戰毛延壽

7.聚星堂五國爭覇

8.董仲舒大破五國



2. 낙저 이주천의 생애와 관력


  낙저 이주천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독립 항목으로 소개되어 있지 않고 단순히 그 문집인 《낙저유고》만 해설이 실려 있다. 그 해설에 관력이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필사본 《낙저유고》도 전기자료가 실린 부록이 없어 자세한 생애를 알 수 없다. 참고자료들을 바탕으로 생애의 대략을 고찰할 수밖에 없다.

  이주천의 부친은 통덕랑 덕봉 이해발이고 모친은 참판 조사수의 딸이다. 조부는 창주 이창진이고 증조는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동계 정온을 옹호한 완정 이언영이다. 《문과방목》에 의하면 이주천은 자는 이능이고 호는 낙저이고 본관은 벽진이다. 칠곡 출신이고 남인 계열이며 현종 3년(1662) 8월에 태어났다. 과거 공부를 독려한 조부 이창진이 1684년(숙종 10) 8월에 별세한 뒤 26세 시절 1687년(숙종 1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남인 집권 시기인 29세 때 숙종 17년(1691)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자마자 바로 부친상을 치렀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숙종 19년(1693) 32세 9월 13일에 예문관 검열(정9품)에 임명되었고, 숙종 20년 1월 22일에는 영의정 권대운이 장기 휴가 후 출근하자 승지 김귀만, 기사관 유세중, 가주서 이덕운 등과 입시하여 군신이 聯句를 지었다. 권대운은 이주천이 詩名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 聯句는 《낙저유고》에도 실려 있다. 숙종 20년(1694) 33세 3월에 갑술옥사가 일어나 남인은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하였다. 6월 20일에 예문관 대교(정8품)로서 인망이 부족하다고 지평 이정익의 논계를 받아 파직되었다. 남인이었기에 축출된 것이다. 이후 실록에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는다. 공이 한림 때 닦은 사초를 지금의 왜관읍 석전리 자고산밑 운수암(지금은 없어졌음)에서 정사하였다. 현감 이해준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부근 개울가에 있는 바위에 이한림수사동이라 새겼으니 그때부터 여기를 수사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비석이 세워져 있으니 비문은 종 7대손 주후(창주문집간행자)가 지었다.

  숙종 29년(1703)에 고산찰방으로 나아가 역폐를 바로잡아 고을백성들이 송덕비까지 세웠으나 당인의 무함으로 또다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숙종 32년(1706) 45세에는 세자시강원 사서(정6품)로서 조부 창주 이창진의 가장을 지었다. -《창주문집》 이해 전후로 관직에 복귀한 것인데 정확해 연대는 미상이다. 숙종 33년(1707) 46세 가을에는 경시관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담양의 면앙정을 관람하고 차운을 지었다. -《면앙집》 그해 10월 26일에 사헌부 지평(정5품)에 임명되었다. 숙종 34년(1708) 47세 3월 22일에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의 아들 윤행교가 부응교, 윤증의 문인 권이진(숙부가 이주천의 장인임)이 수찬에 임명될 때 이주천(권이진과 막역지우임)도 다시 지평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 28일에 지평으로서 응지 상소하여 당파 소멸시키는 방도를 논하니 임금이 호평하였다. 이후 실록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조용히 살다가 50세 되던 숙종 37년(1711) 3월 13일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공자동 선영에 있다. 묘비가 있으니 학전 이기호가 비문을 짓고, 연단 김주덕이 묘지문을 지었다.

  이주천의 조부는 《창주선생문집(滄洲先生文集)》을 남긴 이창진이다. 그 문집 해제를 소개한다.


《창주집》 

조선후기 학자인 이창진(李昌鎭 ; 1619∼1684)의 시문집이다. 이창진의 자는 운장(雲長), 호는 창주(滄洲), 본관은 벽진(碧珍), 언영(彦英)의 아들이며 칠곡(漆谷)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행동을 바로하고 학문에 힘썼다. 1650년(효종 1) 과거에 응하려고 할 때 성균관 유생이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승무를 청한 것을 영남유생이 반대하다가 소를 올린 우두머리가 유벌(儒罰)을 받는 것을 보고 과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어 과거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독서와 수양에 힘썼으며, 만년에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주천의 증조는 문과장원에 좌부승지를 역임한 완정 이언영인데 가문의 벌열을 소개하고자 그 인물에 대해 약술한다.


이언영(李彦英)

1568(선조 1)∼1639(인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 공조좌랑 이등림(李鄧林)의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 생원이 되고, 1603년 식년문과에 장원을 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호조정랑·태복시 첨정(太僕寺僉正)을 거쳐 다음해 사간원 정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원사(寃死)를 주장하는 정온(鄭蘊)을 변호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인조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성균관직강·사예(司藝)·내자시정(內資寺正)·사헌부장령을 거쳐 1625년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그뒤 밀양목사·청주목사·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를 도와 10여년 동안 국방에 힘썼으며, 만년에 낙동강가에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저서에 《완정문집》이 있다.


3. 金山寺創業宴錄과 金山寺夢遊錄


① 창작 시기 추론

  <금산사창업연록>은 17c에서 18c까지 살다 간 낙저 이주천(1662~1711)이 지었고 문집에 창작 연대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느 세기 작품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아무튼 17c 말 아니면 18c 초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굳이 추정하자면 이주천이 30세 때 3월에 문과에 급제하고 6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시작하고 1년 지난 해인 숙종 18년(1692) 5월 5일에 <詞賦分彙目錄序>를 지었는데 이 글은 중국 역대 문장의 격조를 품평한 것이다. 이주천의 <사장백전지>는 <사부분휘목록서>에서 평한 격조를 소설화한 것인데 <사장백전지>의 핵심인물은 제갈량이고 <금산사창업연록>의 핵심인물도 제갈량이다. 이런 면에서 이 3편은 유사한 사상과 유사한 방식으로 지은 작품이니 비슷한 시점에 저술된 것으로 본다면 1692년(숙종 18) 그의 31세 때 거상 시기 무렵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주천은 《삼국지》를 애독하여 그의 작품에 많이 반영하였는데 특히 제갈량을 숭모하여 <제갈무후화상찬>을 지어 그 대재를 펴보지 못한 것을 비탄하기도 하였다. 삼국 시대 인물들에 관심이 깊어 <삼국찬>을 지어 촉신 20인, 위나라 문무 17인, 오나라 문무 16인 및 기타 漢末人 15인, 제후객 17인, 晉初人 6인을 한사람사람 묘사하기도 하였으니, 소설을 집필하기 위한 사전 인물 탐색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촉나라만 신이라 하고 위나라나 오나라는 문무라고 칭했는바 정통론에 입각하여 촉나라를 정통 국가로 인정하고 그 나라만 신이라고 칭하여 정식 신으로 인정한 것이니, 용어 하나에서도 이주천의 정통사상을 엿볼 수 있다.


② 금산사의 금화사 개칭 동인

  <금산사창업연록>은 중국 강소성 진강시에 있는 전통 명찰 금산사를 배경으로 낙저 이주천이 지은 몽유록소설이다. 몽유록 양식이므로 후대에 누군가가 아예 제목조차 <금산사몽유록>으로 개제하였다. 그러다가 더 후대에 다시 배경조차 금산사에서 금화사로 바꾸어 <금화사몽유록>이라고 개제하였다.

  몽유록이라고 고친 것은 가능하나 금산사를 금화사라고 고친 것은 원의를 왜곡, 손상시킨 것이다. <금산사창업연록>의 말미에 覺夢 이후 부기에 홍무연간 명태조가 신하들에게 자기가 일찍이 금산사에서 꿈에 한고조, 당태종, 송고조와 잔치를 벌인 꿈을 꾼 일이 있음을 말하고 화가에게 시켜 3 황제의 초상을 그려 금산사 벽에 걸어놓게 한 적이 있음을 밝혔으니,  금산사는 임의로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장소이다. 소설의 주인공 명태조를 청태조로 바꿔서는 안되듯이 금산사를 아무런 근거없이 금화사로 바꿔서는 안 될 것인바, <금화사몽유록>은 잘못된 작품명이다.

  그런 잘못이 일어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반드시 이유가 잇을 것이다. 그것은 금산사에 대한 기피라고 생각된다. 금산사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게 된 사유가 발생한 것이다. 그 이유를 환성 지안(1664~1729) 사건에서 찾고자 한다. 환성 지안은 조선후기 숙종조에 화엄경 강회를 주도한 대강백이었다. 그는 서산대사의 4세손인 월담 설제(1632~1704)의 제자이다. 영조 1년(1725)에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학인 1,400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영조 5년(1729)에 법회 관계의 일로 무고를 받아 호남의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으나 반대의견 때문에 다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도착한 지 7일 만에 병을 얻어 입적하였다. 나이 65세 법랍 51세였다. 해남 대흥사에 비가 있다. 저서에 《선문오종강요》와《환성시집》이 있는데, 《선문오종강요》는 백파 긍선의 《선문수경》에 계승되어 선사상사에 큰 영향을 미친 명저이다.

  환송 지안은 불교계에선 조선후기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닦는 전통을 남긴 환성파의 시조이자 대흥사 13 대종사의 1인으로도 숭봉되었지만 정치계에선 역적의 누명을 쓴 기피대상이었고 자연스레 역적의 소굴로 인식된 금산사란 절도 금기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엉뚱하게 <금산사몽유록>이란 소설명을 <금화사몽유록>으로 바꿀 수밖에 없게 한 장본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③ 金山寺創業宴錄(原)과 金山寺夢遊錄(改)의 대비

  <금산사몽유록>의 시대 배경으로 원말과 명말의 양대 계통이 있다. 원작인 <금산사창업연록>은 원지정간이니 원지정간이 정확한 시대 배경이다. 몽유록소설로서 몽유의 주인공은  江東一秀才와 成虛가 있는데 원작에 江東有一秀才라고 묘사했으니 강동일수재가 분명한 주인공이다. 入夢과 覺夢에서 각몽한 뒤 강동일수재가 몽중 일을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니 다들 망령된 소리라고 여겼으나 명태조의 꿈 이야기가 공개된 뒤에야 망령된 소리가 아니라고 여겼다고 하여 자기 작품의 진실성을 강조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리해야 자기 작품이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보다는 근거 있는,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는 점이 강조되어 더 많이 독자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가치 있게 여겨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산사창업연록>은 이후 소설 독자층에 큰 인기를 얻어 맣은 개작-<왕회전>과 모작-<여와전>이 이어졌고 작품명도 그때그때 변개되었다. 금산사와 금화사 양대 계통으로 몽유록이 대표적인 명칭이고 다시 <금산사기>나 <금화사기> 또는 <금화사경회록> 등 다양하게 불리었다. 그런데 한글본도 산생되었는데 원제와 같은 <금산사창업연록>와 한 글자가 틀린  <금산사창업연의>이다. 시대나 주인공, 결말은 원작과 비슷하니 원작을 바탕으로 字句의 변개만 가미되어  번역된 것으로 여겨진다.

  


4. 金山寺創業宴錄의 創作 寓意


  각몽 뒤에는 跋이라고 하여 발문이 있다. 작품의 유래에 대한 서술은 없고 스스로 작품을 분석하고 요지를 진술한 것이다. 이주천이 강조한 요지는 辨華夷하여 천하통치의 大統으로 삼고, 用賢才하여 태평을 이루는 要務로 삼고, 定都邑하여 규모를 창조하는 大本으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한 복고회은 같은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키지 낳은 것은 처음에 안사의난 평정에 협조하였지만 나중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책한 것으로 風敎에 역행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여 충군 등 유교의 도덕 윤리를 강조하여 소설을 집필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속된 말을 사용했지만 요체는 成治安民과 識時用人의 방법이니 패설이라고 하여 경시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결국 이주천은 소설을 통해 바른 정치의 방법을 우의적으로 설파한 것이다.

  이주천이 바른 정치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세 가지 요체이다. 辨華夷, 用賢才, 定都邑이 그것이다. 用賢才야 만고 불변의 법칙이지만 辨華夷는 아직도 그 시대에 요구되는 것이었는가. 定都邑은 조선의 입장에선 이미 안정된 현상인데 새삼 거론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천도를 논의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금산사창업연록>의 핵심 요체는 辨華夷 3자에 있다고 본다. 숙종 시대만 해도 반청숭명 사상은 온전하였고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수치로 여기었고 이미 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조선이 중화의 문물을 보존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충만한 시절이었으니 화이사상으로 중화인 조선과 오랑캐인 청과를 구별짓고 자존심을 지킬 필요가 정책적으로 의식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주천은 명나라의 중흥을 대망했을 수도 있다. 작품에서 중흥주를 강조하고 몽고의 침입도 격퇴하는 것을 설정한 것도 청을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다시 부흥시킬 군주를 염원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최소한 멸청복명의 대업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양자강을 경계로 중국을 양분하고 남경에 도읍을 정한 중국 남조 시대처럼 다시 한번 더 남경을 거점으로 한 南明의 부활을 일으킬 중흥주의 출현을 기원하며 <금산사창업연록>을 지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定都邑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주천은 명나라가 중흥되어 중화문물이 보존되고 조선이 다시 한번 중화문화권에서 예의지방으로서 지낼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 꿈을 이루어줄 명나라 중흥주의 출원을 염원하며 그의 정치적 대망을 담아 상중의 시간을 내어 몽유록이란 형식에 우의하여 31세 시절 숙종18년(1692)에 <금산사창업연록>을 지은 것이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