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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소설

함양학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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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곡대사비명 文谷大師碑銘

  대사의 법휘는 영회(永晦)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장수사(長水寺)에 들어가 묘언(妙彦) 스님에게 투신하였다. 이미 몇 해가 지나가자 묘언이 그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기이하게 여겨 타이르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 너는 회당(悔堂)을 귀의처로 삼아라."고 하였다. 회당은 곧 정혜대사(定慧大師 1685~1741 원호는 회암晦庵이다)니 화엄종주로 유명하였다. 스님은 힘써 귀의하였다. 배운 지 몇 년 되어 바야흐로 불경에 통달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입으로 하는 학문은 수고롭고 마음의 학문은 고상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소매를 떨치고 금강산과 묘항산에 들어가서 정신을 오로지하여 안으로 참구하고 삼매(三昧)가 아니면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 우리 유가는 불가를 비난하여 이단이라고 한다. 비난하는 자가 자격이 있은 뒤에야 비난당하는 자가 그 그름을 안다, 지금의 학자는 어찌 일찍이 마음으로 하고 입으로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배운 바가 참으로 성리학의 책 몇 권만 섭렵하면 피곤할 정도로 그 입에 올리는 것은 성명(性命)이니 이기(理氣)니 하는 것이다. 명성이 여기에 있고 영화로움과 이익이 여기에 있다. 그 마음을 돌아보면 이미 황폐해졌다. 그런 자들은 남들을 바로 잡을 겨를이 없이 남들에게 바로잡히느라 겨를이 없을 것이다. 스님의 기풍을 들으면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
  스님은 만년에 덕유산 향적봉 아래 구천동(九千洞) 백련사(白蓮社)에 머물며《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등 책으로 사방에서 오는 이들을 교수하였다. 71세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법랍(승려가 된 햇수)은 55세이다. 다비(승려의 화장식)하는 날에 기이한 징조가 많았다고 한다. 스님의 속성은 이씨로 농서군공(농서군공:이장경李長庚 성주이씨의 중시조)의 11세손이다. 문곡은 그 호이다. 그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 산청 율곡사의 봉암대사의 제자로 채제공에게 봉암대사 비명을 받으러 간 스님)으로 하여금 편지를 갖고 천리 길을 달려 나에게 비명을 청하게 하였다. 그 의리가 가상하여 명(銘)한다.

나는 우리 유가를 옳게 여기니
부처에게 어찌 아첨하리오
명을 지어 후세에 보이나니
한마디 말이 뜻에 맞으리.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영조 때에 판서를 역임하고 정조 4년(1780) 이후 8년간 서울 근교 명덕산(明德山)에서 은거한 뒤 정조 12년(1788)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 후기 남인 정승으로 명재상이었다. 어릴 때 단성현감인 부친을 따라 산청에서 6년을 살아 그 인연으로 율곡사 승려 봉암대사(鳳巖大師의) 찬영문(讚影文)과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1772년 영조 48년에 문곡(文谷)대사가 백화(白花), 환암(喚庵) 대사와 함께 영원암(靈源庵 마천면 삼정리)에서 만일회(萬日會) 개최. 문곡은 이 몇 년 뒤에 서거하고, 환암은 영원암에서 10년 살다 서거함.경암집.1778년 정조 2년에 문곡(文谷)대사의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으로 하여금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게 찾아가 문곡대사의 비명(碑銘)을 받아오게 함. 풍신은 봉암(鳳巖)대사의 제자로 임색(任臣+責)의 편지를 가지고 번암을 찾아가 봉암대사의 비명을 받아오기도 하였다.번암집. 문곡대사는 함양군 안의면의 장수사 출신이라서 장수사 터 용추폭포 위쪽 기슭에 부도가 있다. 석종형 부도로 문곡지탑(文谷之塔)이라 새겨져 있다. 문곡대사의 스승 묘언은 번암 채제공이 영찬을 지은 취은대사로 추정된다. 취은대사의 영정은 장수사 육사탱(1788년 정조 12년 은신암 산신탱과 일괄 그림)으로 남아 있다.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文谷大師碑銘


大師法諱永誨。十三。出家入長水寺。投玅彦師。旣數年。玅彦異其聰慧。諭之曰。吾不敢闍梨爾。爾其以晦堂爲歸。晦堂卽定慧大師。以華嚴宗主名。師俛焉歸依學幾年。方且見星於法海三藏。一日忽曰。口學勞心學高。遂拂袖入楓嶽竗香。專精內究。非三昧不屑焉。嗚呼。吾儒詆佛氏以爲異端。詆之者有諸己而後見詆者知其非。今之學者曷嘗有以心而不以口者乎。所學苟能涉程朱書數卷。敝敝焉尙厥口。曰性命也。曰理氣也。聲名焉在是。榮利焉在是。顧其心茅已塞矣。若然者。吾恐其未暇正人而見正於人之不暇也。聞師之風。庶可以知所警矣。師晩住德裕香積之下九千洞白蓮社。以華嚴圓覺楞嚴書。敎授四方來者。七十一怡然示寂。法臘五十五。闍維之夕。多異徵云。師俗姓李。隴西公十一世孫也。文谷其號。其徒貽成。使豐信賫書走千里。乞銘於余。其義足尙。銘曰。
吾是吾儒。佛何足媚。銘以示後。唯是一言契意。

 용추사 부도군(龍湫寺 浮屠群)  

용추사(龍湫寺) 건너편 용추폭포 위쪽 기슭에 석종형 부도 3기가 있는데 1기는 둥근 대형 좌대석 위에 있다. 그것은 청심당(淸心堂)의 것이고 나머지 2기는 "문곡지탑(文谷之塔)", "연우당축훈대사탑(煙藕堂竺訓大師塔)"이란 명문이 있으나 문곡대사 외는 모두 시대와 사적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설파대사비명 雪坡大師碑銘

  어느 날 나는 일이 있어 우연히 도성 문밖으로 나갔더니 헤진 납의를 입은 중이 벽제하는 소리를 못 들은 듯이 갑자기 앞에 엎드렸다. 그 안색이 민망하고 급박한 사정이 있는 자 같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겨 너는 무엇을 하는 자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승은 호남의 중으로 성연(聖淵)이라고 합니다. 법사인 설파화상을 위하여 대인께 한마디 말을 얻고 거듭 시방의 중생을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나라에 금법이 있어 중은 도성에 들어갈 수 없고 정승 집에는 또 사사로운 정을 전달할 수 없기에 성밖의 여관에서 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름 지나 가을 되고 가을 지나 겨울 되어 쓰러져 죽는 것이 조석간에 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으렵니다." 고 하였다. 나는 뭉클하게 그 정성에 감동하여 그들이 지은 행장을 올리게 하였다. 행장은 다음과 같다.
  대법사의 이름은 상언(尙彦 1707~1791)이고 호남 무장현(茂長縣 :지금 고창군 무장면) 사람이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이다. 부친은 태영(泰英)이고 모친은 파평윤씨이다. 조실부모하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살길이 없었다. 19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투신하여 운섬(雲暹) 장로에게 머리 깍고 연봉(蓮峯)과 호암虎巖(체정體淨, 1687~1748 환성지안의 제자임) 두 화상에게 게송을 받았다. 또 회암(悔菴:정혜定慧 1685~1741) 스님에게 배웠다. 선종(禪宗)의 계보로 말하면 서산(西山)에게 7세손이 되고 환성(喚醒:지안志安 1664~1729)에게 손자가 된다. 33세에 대중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용추(龍湫) 판전(板殿)에서 강좌에 올랐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대단히 총명하였는데 여러 이름난 스님들을 참방함에 미쳐서는 불교의 진리에 대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즉시 이해하였다. 신묘한 이해는《화엄경》에 더욱 풍부하였다. 반복하여 공부한 것은 한강의 모래알 수처럼 많고 강송하는 소리는 꾀꼬리 울음같이 퍼지었다. 마침내 그 틀린 점을 바로잡고 그 귀취를 통일하여 근세 바보의 꿈 이야기같은 견해를 씻어 버렸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어 각각에게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였는데 그 설이 무궁무진하였다.
  옛날 청량대사(淸凉大師:징관澄觀?~839 중국 당나라 스님)가 《화엄경수소연의초》를 지었는데 그 뜻이 은미하여 강해하는 이들이 괴롭게 여겼다. 스님이 한번 보고 동그라미 쳐서 소(疏)니 과(科)니 표시하여 각기 귀결됨이 있게 하였다. 마치 나그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이윽고 승재와 부영 등이 스님에게 사뢰기를 "《화엄경소초》 가운데 인용한 것에도 틀리고 쓸모없는 것이 없지 않으니 어찌 해인사로 옮겨가 여러 판본을 고증하여 다른 점을 보충하지 않습니까?" 하자 스님은 가서 머물며 비교 고증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금강산에 유람한 것은 두 번, 묘향산 한 번, 두류산은 늘 참선하였다.
  영조 46년(1770)에 징광사(澄光寺: 순천시 낙안면 소재)에 불이 나서 소장되었던《화엄경》80권 책판이 다 소실되었다. 스님이 탄식하며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에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고 하였다. 그리하여 재물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그 불명확한 부분은 오직 스님이 입으로 외운 것에 의지하였다. 책판이 완성(영조 50년, 1774)된 뒤 새로 장판각을 영각사(靈覺寺: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소재)에 세워 보관하였다. 그 며칠 전에 호랑이가 절 뒤에서 땅을 후벼팠었고 승려의 꿈에서도 신이 고하기를 '이곳은 여래의 대경(大經)을 간직할 만하다.' 고 하였었다. 《화엄경》을 장판각에 봉안할 때 상서로운 빛이 공중에 서리니 모인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여겼으나 스님은 우연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뒤로 영각사에 우거하였다. 어느 날 주지에게 이르기를 "절을 이건하지 않으면 반드시 물에 무너질 것이니 어찌 도모하지 않는가?" 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큰 물이 져서 절이 과연 무너지고 승려들도 많이 빠져 죽었다. 그제야 대중들이 그 신통함에 감복하였다.
  노년에 영원사(靈源寺:함양군 마천면 삼정동 소재)에 들어가 죽을 각오로 염불로써 일과를 삼았다. 날마다 천 번 염불하는 것을 열 번 되풀이하였는데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정조 14년(1790) 섣달에 작은 병에 걸렸고 15년(1791) 1월 3일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이날 제자 27명이 받들어 다비하였다. 여러 고승이 달려와 통곡하였고 하계의 중생들도 서로 고하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일찍이 근세에 화장할 때 사리(舍利:화장한 뒤 남는 영롱한 구슬)가 나온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다비함에 미쳐 상서로운 빛이 7일 밤 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나 끝내 한 개의 사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교의 이치로 보면 있다는 것도 애초에 없다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애초에 있다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라고 해도 가하고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이라고 해도 또 불가할 것이 없다. 참으로 있고 참으로 없고를 누가 능히 분별할 수 있겠는가? 뭇 제자들이 그 정성을 기탁할 데가 없어 영원사에 부도를 세웠는데 선운사 승려도 그렇게 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머리를 깎은 것을 기념하여서이다.
  아, 스님은 한마디로 평가하면 화엄경의 충신이고 성연은 또 스님의 충신이다. 섬기는 대상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유가나 불가나 다를 것이 없다. 내가 명을 짓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겁의 후인들을 권장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스님이 임종시에 제자에게 당부하여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고 또 부득이하면 채상국(蔡相國)에게 비명을 청하지 않으면 불가하다고 한 경우이겠는가? 나는 스님을 모르는데 스님은 나를 잘 아니 의리상 저 버릴 수 없어 이에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불교에 《화엄경》이 있으니
바른 법이요 중요한 경전이라
누가 받들어 가졌는가
설파의 마음은 유구하다
불의 신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날뛰어 태웠는가
머리 속에 옮겨 간직했다가
저 책판에 올려 새기었다.
여래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길
나는 너를 훌륭히 여기노라
설파의 공덕에 대하여
나는 이와 같이 들었노라.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영조 때에 판서를 역임하고 정조 4년(1780) 이후 8년간 서울 근교 명덕산(明德山)에서 은거한 뒤 정조 12년(1788)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 후기 남인 정승으로 명재상이었다. 어릴 때 단성현감인 부친을 따라 산청에서 6년을 살아 그 인연으로 율곡사 승려 봉암대사(鳳巖大師의) 찬영문(讚影文)과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영각사에 간직되었던 《화엄경》 책판은 6.25 때 불탔다. 영원사에는 지금도 육각의 옥개석이 있는 장중한 모습으로 설파당탑이라 새겨진 부도가 남아 있다.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雪坡大師碑銘


日。余因事偶出郭門外。有弊衲僧如不聞呵道。突黑衣卒伏於前。其色若有悶急者然。余恠問曰。若何爲者。對曰。僧乃湖南沙門名聖淵者。爲法師雪坡和尙。願得大人一言重。以詔十方衆生。有邦禁也。僧不可以入都城。相門又不可以私情導達。乞城外旅店食。夏以秋秋以冬。僵死在朝暮。然不得所願。欲死無歸。余油然感其誠。許令進所爲狀。其狀曰。大法師名尙彦。湖南茂長縣人。國朝孝寧大君十一世孫也。父泰英。母坡平尹氏。早失怙恃。家甚貧無以自資。年十236_559c九。投禪雲寺。薙髮于雲暹長老。受偈於蓮峯虎巖兩和尙。又參晦菴丈室。以禪系言之。於西山爲七世孫。於喚惺孫也。三十三。因大象固請。陞座於龍湫板殿。師自幼穎悟甚。及參諸名師。三乘五敎。無不言下卽會其玅契神解。於華嚴尤篤。反覆則恒河計沙。講誦則迦陵遍音。卒能正其譌一其歸。以滌近世癡人說夢之見。願學者日以坌集。各示金繩覺路。其說纚纚不竆。在昔淸涼大師有所撰抄中䟽科。其義多隱晦。講解者病之。師一覽。圈而表之。曰疏曰科。各有攸宿。如客得歸焉。頃之。勝濟㫙穎等白師曰。大經抄中所236_559d引。亦無不衍誤。盍移錫海印。證諸本以補同異。師往留之。考較乃已。自是遊金剛者再。妙香者一。頭流常面壁焉。庚寅。澄光寺火。所藏華嚴八十卷板一無遺。師歎曰。於斯而不盡心。其敢頂禮如來。於是鳩財剞劂。人天助力。春始夏訖。其晦䵝者。惟師之口誦是賴焉。板旣完。新建閣峙諸靈覺寺傍。前數日。有虎跑寺後。僧又夢神人告曰。此可藏如來大經云。方經之安於閣也。有瑞光蟠空。會者咸異之。師以爲此偶然也已。是後寓靈覺。一日謂寺主曰。寺不移建。必圮於水。盍圖之。亡何。水大至寺果圮。僧亦有胥溺。衆乃服其236_560a神。及老入靈源立死關。以念佛爲課。日輪千念十周者十有餘年。庚戌臘。示微。辛亥正月三日。怡然入寂。壽八十五。臘六十六。是日也。弟子二十有七人。奉以涅槃。諸龍象奔奏號哭。雖下界衆蚩。亦莫不相告齎咨。師嘗論近世火浴舍利之出。有不慊于心者。及涅槃。雖祥光七夜不減。竟不以一舍利現靈。釋氏觀理。有固未始不爲無也。無亦未始不爲有也。有而謂之無可也。無而謂之有。亦無不可。眞有眞無。又誰能辨之。羣弟子無以寓其誠。豎塔靈源。禪雲僧亦如之。此不忘舊時薙髮也。嗚呼。師一言以蔽之。曰華嚴之236_560b忠臣也。若聖淵。又師之忠臣也。盡心所事。儒與釋道未嘗不同。余不銘。何以勸在後之千劫也。况師臨化飭弟子曰。愼勿碑。又曰。如不得已。非乞銘蔡相國。不可。余不知師。師能知余。義不可相負。乃作銘。銘曰。
佛有華嚴。正法眼藏。誰其抱持。雪坡心長。鬱攸何物。敢爾跳踉。移諸腹笥。登彼文梓。如來色笑。曰余嘉爾。雪坡功德。我聞如是。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영원사 부도군(靈源寺 浮屠群)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영원사 입구에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다. 가운데 육각의 옥개석이 있는 장중한 부도는 조선 후기 화엄학(華嚴學)의 고승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의 부도이다. 상언스님은『화엄경』 판목을 다시 새겨 영각사(靈覺寺)에 봉안하였고, 영원사에서 10여 년 동안 염불을 일과로 하여 하루에 1만편을 염송했다고 한다. 그의 부도는 고창 선운사에도 있다. 다른 4기는 벽허당[碧虛堂(1.1m)], 영암당[影巖堂(1.2m)], 중봉당[中峯堂(1.3m)], 청계당[淸溪堂(0.9m)]의 부도인데 중봉태여(中峯泰如 ?~1830) 이외는 법명은 미상이다.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고려처사 성산이공(휘억년)의 묘


고려왕조는 중기 이후 권력자가 발호하고 외적이 침입하여 종묘 사직이 위태하고 백성이 어육이 되었다. 이때에 기미를 알고 은둔하여 물들지 않은 사람으론 녹사 한유한①과 요산공 이억년②이 유일할 것이다. 녹사는 고려 신종 시기에 최충헌(1149~1219)이 집권하고 몽고가 국토를 잠식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서쪽으로 은둔하였다. 뒤에 나라의 초빙을 받게 되자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그 시에,

“한 편의 조서가 산골짝에 날아 들어오니

비로소 이름이 인간 세계에 알려진 것을 알게 되었네”

고 하였다. 요산공은 충렬왕(재위 1274∼1308) 때에 원나라가 송나라(960∼1279)를 멸하고 나라의 기강이 해이된 것을 보고 새로 문과 급제자의 신분으로 떠나 지리산 북쪽에 숨어 은거하는 집을 한 채 짓고 도정정사라고 이름붙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10년의 속세 일은 꿈 밖의 일인데

청산 어느 곳에서 홀로 대문을 닫아걸고 있는가?”

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로도 공의 고상한 뜻이 김이상(1232~1303), 허겸(김이상의 제자, 다 송말원초의 은사임)③과 상통함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들은 드러나고 요산공은 묻힌 것이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더군다나 한 녹사는 남명의 평가를 얻어 산봉우리에 옥을 얹어놓고 수면에 달빛이 생긴 듯 백세에 빛나지만④ 요산공은 일두(정여창)선생과 탁영(김일손)선생의 평가를 얻지 못하고 그 <두류록>에 누락되었고 또 자손이 영락하여 우리 대동보에도 빠졌으니 거듭 비탄할 만하다.

공은 곧 우리 선조 농서공(이장경)의 제4자이고 매운당 문열공 이조년(1269~1343)⑤의 넷째 형이다. 묘소는 함양군 엄천(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 임좌병향의 언덕에 있다.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마을을 가리켜 억년동⑥이라고 한다. 사림이 안산서원⑦(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성주이씨 22현을 합사)에 배향하였다.

부인은  경주 이씨로 이용간의 딸이다. 쌍분으로 장례지냈다. 아들 태성은 밀직사사이고 태문은 낭중이다. 사위는 광평군 이능⑧(이호성의 5세조)이다. 손자는 일방으로 장남 소생이고 함방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치 않는다.

후손 이교연 등이 비석을 다듬어 언덕에 세우고자 하여 내게 기록을 청하였다. 우선 그 가문 전승의 기록을 토대로 그 글을 부연하여 이렇게 적는다.

을축년(1925) 3월 방손 이도복⑨(1862~1935) 삼가 지음

후학 청송 심상복⑩(1876~1951) 삼가 씀

후학 언양 김윤수 삼가 옮김

시조시인 김용규 탁본


李億年墓碑文 


高麗處士星山李公之墓

配慶州李氏祔左

勝國自中葉以降 權臣跋扈 外寇陸梁 宗社綴旒 生靈魚肉 當是時 能見幾而

作 隱遯不汚 其惟韓錄事惟韓 李樂山諱億年乎 錄事當神宗時 見崔忠獻用

事 蒙古蠶食 棄官隱遯于方丈之西 後蒙旌招 而以詩示志曰 一片絲綸飛入

洞 始知名字落人間 樂山公則 當忠烈王時 見胡元簒宋 王綱解紐 以新榜文

科 去隱于方丈之北 築一巖栖之室 牓曰道正精舍 嘗有詩云 十載紅塵夢外

事 靑山何處獨掩扉 祗此一事 可想公志尙 與金仁山許白雲同調而其顯晦

之相遜 如彼者何哉 且况錄事得南冥而峯頭冠玉 水面生月 有光於百世 若

吾樂山公 不得於一蠹濯纓 而見漏其頭流錄 又因子姓之零替 漏我大同譜

重可悲也 公卽我先祖隴西公之第四子 而梅雲堂文烈公諱兆年之叔兄 墓

在咸陽郡嚴川負壬之阡 時人至今指點其里曰億年洞 士林從享安山書院

夫人慶州李氏龍幹女 葬用魯人禮 子男台成密直司事 台文郎中 女壻廣平

君稜 孫男日芳長房出 涵芳次房出 曾玄不盡錄 後孫敎然等 將伐石以竪

陘 請余以記之 姑據其家傳所錄 抽演其說 如此云爾

旃蒙赤奮若淸明節傍裔孫道復謹撰

後學靑松沈相福謹書


① 한유한-<고려사 열전>

한유한은 역사에 그 계보 기록이 없다. 대대로 개성에 살았고,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최충헌이 독재하고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리가 날 것이라고 하고는 처자식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굳은 절개로 깨끗하게 살며 외부인과 교유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 풍취를 고상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불러 서대비원 녹사로 삼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깊은 골짝으로 이거한 채 종신토록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거란 병의 침략이 있었고 몽고 병이 연이어 침입하였다.

韓惟漢. 

韓惟漢史失其系世居京都不樂仕進見崔忠獻擅政賣官曰難將至矣. 挈妻子入智異山淸修苦節不與外人交世高其風致. 徵爲西大悲院錄事終不就乃移居深谷終身不返未幾果有契丹之難蒙古兵繼至.

 

② 이억년(李億年) :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 1285년(충렬왕11년)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치사(致仕), 위성(渭城: 함양) 엄천리嚴川里)로 들어가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공맹의 도를 강론하였다. 성주의 안산서원, 금릉의 상친사에 제향.

《성주이씨세보》에 “또 다른 이름은 영(永)이요 호는 요산재이다. 을유년(1285, 충렬왕11)에 문과에 올라 개성유수를 역임하고 무술년(1298, 충렬왕24)에 위성으로 이거하여 도정정사를 짓고 십재홍진몽외사하니 청산하처독엄비란 시를 지었다. 묘는 함양 남쪽 휴천면 문정촌 장항촌내 임좌다. 영정은 안산사에 봉안하다. 부인은 경주이씨 용간의 딸이요 묘는 쌍분이다.” 하였으니 묘비문과 족보 행적이 상이하다. 묘비문은 문과급제하자마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족보는 개성유수를 역임한 뒤로 서술하고 있다. “10년의 홍진을” 하는 시구를 보면 10여 년 벼슬살이를 한 듯하다. 다만 개성유수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 처음 설치되었다.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시대까지는 이억년의 문과급제 사실만 알려지고 개성유수 벼슬 사적이 밝혀지지 않았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이 1월부터 8월까지 왕위에 올라 재임중 여러 사람을 중경유수나 개성부윤을 시켰는데 이억년의 이름은 없지만 그전에라도 역임했을 수 있다. 이억년은 충선왕파로서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복귀하자 산간오지 함양 지리산 도정동으로 피신하여 은거하고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이 다시 복위했을 때는 이미 별세하여 복권되지 못한 듯하다.

<연려실기술>(1776, 영조 52년)의 성주 서원조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1602,선조35)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ㆍ이인복(李仁復)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ㆍ이숭인(李崇仁)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 ㆍ정곤수(鄭崑壽)선조조의 명신.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1635,인조13)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 ㆍ이백년(李百年)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ㆍ이천년(李千年)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ㆍ이만년(李萬年)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 ㆍ이억년(李億年)문과에 합격하였다. ㆍ이조년(李兆年)위에 보라. ㆍ이인기(李麟起)평양 부윤을 지냈다. ㆍ이승경(李承慶)평장사를 지냈다. ㆍ이포(李褒)문하시중을 지냈다. ㆍ이원구(李元具)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 ㆍ이인복(李仁復)위에 보라. ㆍ이인임(李仁任)출향(黜享)되었다. ㆍ이인민(李仁敏)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 ㆍ이숭인(李崇仁)앞에 있다. ㆍ이직(李稷)태조조의 정승 ㆍ이제(李濟)태조조의 명신 ㆍ이사후(李師厚)한성윤(漢城尹)이다. ㆍ이육(李稢)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 ㆍ이광적(李光廸)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우애 이야기- 투금탄(投金灘)

서울시 강서구 가양2동 앞 한강여울(지금은 )을 투금탄이라 한다. 『성주이씨가승』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고려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젊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이 나눠가졌다. 형제는 공암나루를 건너고자 나룻배를 탔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한강 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이 깜짝 놀라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생은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 형제의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던들 나 혼자서 금덩이 두개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악한 마음이 들어 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려고 해서 액물인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했다. 이에 형님도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③ 김인산 [金仁山 1232~1303] 

중국 송말(宋末) ·원초(元初)의 유학자.

본명  김이상(金履祥)

별칭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인산선생

국적  중국 송(宋)ㆍ원(元)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주요저서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이름 이상(履祥).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출생. 인산선생(仁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군서(群書)에 통달하였다. 장년이 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왕노재(王魯齋) ·하북산(何北山)에게 사사하고, 주자(朱子) ·황면재(黃勉齋)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송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책(奇策)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으며, 송나라가 멸망하자 진화산[金華山]에 숨어 살았다. 문집에 《인산집(仁山集)》, 주요저서에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등이 있다.


허백운(許白雲) 허겸(許謙)

절강성 금화 사람이다. 자는 익지요 어려서 고아 되고 학문에 힘썼다. 인산 김이상에게 수업하여 그 비오를 다 전수받았다. 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마을 밖을 나가지 않은 지 40여 년이었다. 공경대부들이 여러 번 천거했지만 초치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강학하여 정성을 다하니 종유한 제자가 1천여 인이었다. 사방의 선비들이 문하에 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사대부들이 그 고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그 집에 들러 안부를 물었고 간혹 예법과 정무를 묻기도 하였는데 듣고서는 모두 만족해하였다. 늦게 백운산인이라 자호하니 세상에서 백운선생이라고 불렀다. 졸하자 문의공이라고 하였다. 저서에 《독서총설》, 《시집전명물초》, 《백운집》 등이 있다. 성리학자로 원초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금원사대가로 불리는 명의 단계 주진형의 스승이다.


④ 산봉우리에 옥을 얹고: 남명(조식)선생의 <유두류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한다면, 십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격이다.

而比韓鄭趙三君子於高山大川, 更於十層峯頭冠一玉也, 千頃水面生一月也.


⑤ 이조년 [李兆年 1269~1343]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별칭  자 원로(元老), 시호 문열(文烈), 성산군(星山君)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 안남서기(安南書記)가 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書郞)을 역임하였다. 1306년 비서승(書丞) 때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하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이에 연루되어 귀양갔다. 그 후 풀려나와 13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고,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왕위찬탈 음모를 원나라에 상소하였다.

12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 수차 원나라에 다녀왔다. 12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 사직,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이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l수가 전한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⑥ 억년동: 억년동은 미상이다.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백련동은 이억년의 백형인 이백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문정리는 일두(문헌공 정여창)선생이 살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문헌동과 이억년의 도정정사가 있던 도정동을 합하여 명칭한 것이다.


⑦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星州郡 碧珍面 紫山里 安山村)에 역대(歷代)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에서 도덕(道德), 경술(經術), 문장(文章), 관직(官職)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貢獻度)가 높은 현조(顯祖) 영정(影幀) 22位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이다.

서원(書院)의 제도는 당나라 현종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등을 설치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는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학습기관 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조 중기부터 보급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신라 불교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계승하였던 까닭에 지방마다 국법으로 건립한 사찰이 있어서 국가에 공로가 현저한 분은 사후(死後)에 반드시 출생지 소속 사찰에 사당(祠堂)을 따로 설립하도록 하고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은 초상화(肖像畵)를 만들어 후세에까지 그 위업(偉業)을 전하도록 하였으니 서원(書院)과 비슷한 제도라 하겠다. 이 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말에 현창(顯彰)한 분이 많아서

중시조 농서군공 이장경(中始祖 西郡公 李長庚),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경원공 이포(敬元公 李褒),

초은공 이인복(憔隱公 李仁復),

도은공 이숭인(陶隱公 李崇仁),

형재공 이직(亨齋公 李稷)

여섯 분의 영정(影幀)을 국가의 숭봉(崇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옆 선석사(禪石寺)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嫡庶) 18王子의 태실을 만들게 됨으로서 산소는 오현(梧峴)으로 이장하고 사당은 이곳 안산사(安山寺)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그후 선조(宣祖) 14년(1581) 후손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영당(影堂)을 중수(重修)하고 제기(祭器) 등을 새로 비치하였으며, 11년후인 임진왜란때 왜적(倭敵)이 침공하여 영정(影幀) 일부를 훔쳐 갔으나 승(僧) 경종(敬宗)이 나머지 영정(影幀)을 잘 수습하여 땅속에 묻어 보관하므로서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조(宣祖) 39년(1606) 외손(外孫) 이덕온(李德溫)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사림(士林)과 더불어 영당(影堂)을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으며,광해(光海) 9년 후손 이욱(李稶)이 경향각지의 친족들과 더불어 네 번째로 중수하고 현종(顯宗) 6년(1665) 6칸 신주(神廚)와 4칸 재실(齋室)을 완성 하였다.

인조(仁祖) 10年(1632)경상감사(慶尙監司)의 허가를 얻어 재실(齋室) 동편에 새터를 잡아 유림(儒林)에서 이문환(李文煥), 곽천우(郭天佑) 등이 도감이 되어 영당(影堂)을 새로 짓고 열세분을 추배(追配)하였으니,

밀직사사이백년(密直司事 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參知政事 李千年),

문하시중 이만년(門下侍中 李萬年),

개성유수 이억년(開城留守 李億年),

평양윤 이인기(平壤尹 李麟起),

요양성참지정사 이승경(遼壤省參知政事 李承慶),

대호군 이원구(大護軍 李元具),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

대제학 이인민(大提學 李仁敏),

경무공 이제(敬武公 李濟),

한성판윤 이사후(漢城判尹 李師厚)등이고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

정헌공 이광적(靖憲公 李光迪)이 추배된 것은 그 뒤의일이다.

숙종(肅宗) 6년(1680)에 다시 문정공 이지활(文靖公 李智活),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

사헌부 전중어사 이조(司憲府 殿中御史 李晁) 등 세분을 추배(追配)하고 춘추(春秋)로 인근 유림(儒林)에서 모여 제사 지냈으나 고종(高宗) 8년(1871)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에 따라 안산영당(安山影堂)으로 이름을 바꾸는 수난(受難)을 겪었다. 그후 병진년(1916) 다시 중수하고 영정(影幀)의 감실(龕室)을 구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제향(祭享)한다.

서원(書院) 앞에는 농서군공(농西郡公)의 신도비(神道碑)는 철종 6년(1855) 경향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鍾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좨주 매산 홍직필(祭酒 梅山 洪直弼)이 비명(碑銘)을 짓고 판서 응와 이원조(判書 凝窩 李源祚)가 글씨를 썼다.

영정(影幀) 10종 13폭은 경상북도 유형(有形) 문화재 제245호로, 영당(影堂)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地方) 문화재(文化財) 제217호로 각각 지정 되었다. 진영(眞影)은 별도 봉안(奉安)하고 있고 현재 봉안된 영정은 100여 년 전에 개모(改摹)한 것이다.


⑧ 이능 5세손- 이호성(李好誠)

  이호성은 조선 초기 무신으로 본관은 성주이고 호는 동산이며, 삼중대광 광평군 이능의 5세손으로 경남 함안에서 1397(태조6)에 태어나  금산에서 1467년(세조13)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정무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고 달리는 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으며 병법에 능통하였다.

  세종 9년(1427년) 무과에 급제, 사복시직장이 되고 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459년 첨지중추원사 겸 경상좌도도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을 요청하였으며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상우도처치사에 임명하였다.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49년 거제 현감에 임명되어 읍을 옮기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했다. 그 후 보성, 경산 고을을 맡아 청백명관으로 알려져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공조참의 거쳐 국정이 불안해지자 노모의 봉양을 애걸하여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가 단종 1년(1453년) 경상우도처지사가 되고 144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세조 3년(1457)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거치면서 왜인의 변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연변제읍의 제색군인을 동서양계의 예와 같이 각기 본 읍에 소속, 수비하게 하고 영진군을 내지 군사로 소속시켜 불의의 일에 임하도록 하며, 아울러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방책과 야인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큰 성을 쌓아 후환을 미리 제거하자고 건의하였다.

  일찍이 최윤덕의 북정 때 편비로 이름을 떨쳐 비장군 이라 불렀으며, 20년 동안이나 북방을 수비하여 산천의 형세를 환히 알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를 함에 실수가 없었다.


⑨ 이도복(李道復) (1862~1935, 철종13~)

성주인 경무공파 19세 수(壽)77세

14세 강촌(江村) 여공(如珙)의 5세손이다.

자(字) 양래(陽來), 호(號) 후산(厚山), 거(居) 단성(丹城) 신안(新安)

철종(哲宗) 13년 임술(壬戌) 1862년 5월 28일생이며 1938년 무인(戊寅) 윤(閏) 7월 8일 졸(卒)했다.

졸(卒) 36후 계사(癸巳)에 사림(士林)에서 진안군 영곡사(靈谷祠) 배향(配享) 하였다.

동곡(桐谷) 조(晁)의 후손, 동범(東範)의 자(子)로 천자(天資)가 강의(剛毅)하고 기우(器宇)가 준정(峻整)하여 박만성(朴晩醒), 송연재(宋淵齋)에게 의기(李氣)와 학문을 전수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곽종석(郭鍾錫)과 조약무효와 오적을 참형할 것을 상소(上疏)하였으며 최면암(崔勉庵)에게 ?수신사명(修身俟命)?이란 글을 받아 후일을 기약했다. 스승 문집간행에 성실히 하고 한유(韓愉)와 깊은 학문을 토론하다 경술국치이후 전라도 마이산(馬耳山)으로 입산, 그곳 호남선비와 상교하며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는데 서어절요(書語節要), 중용도(中庸圖), 이학통변(理學統辨), 기정동감(紀政宗鑑), 심현기년(三賢紀年), 치종록(致宗錄), 존화록(尊華錄), 동감절요(東鑑節要) 등과 문집 22권 11책이 전한다.


⑩ 심상복(沈相福: 1876~1951)

목판본 古書 탄생과정 '한눈에' 2004-07-14

한말 이후 서부 경남 유학자 집안 목활자 인쇄문화의 전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목활자 일괄 유물이 박물관에 기증돼 일반에 공개 됐다.

특히 전시되는 6만5천여 개의 목활자는 유일하게 제작자가 알려진 개인 제작 활자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고경희)은 지난 13일부터 8월31일까지 '목활자로 보는 옛 인쇄문화-심재온 기증유물전'을 열고 있다.

특별전 에 나온 유물들은 지난해 3월 심재온(79·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 계리)옹이 기증한 목활자와 인쇄용 소도구, 고서적들. 여기에는 활자새김에서부터 책으로 간행되기까지 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목활자 6만5천186개, 활자를 분류해 보관하는 상자 21판, 활자 식자판 4개, 새기는 칼 등 활자 관련도구 들이 그 것. 또 활자 집게용 젓가락, 식자용 송곳 등 판짜기 도구, 책 표지 장식 그림인 능화판(菱花板)과 밀돌 등 제본용 도구, 활자를 처음 새기기 위해 쓴 활자초인자본(活字初印字本),교정지 등도 포함돼 있다.

또 1880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215종 551책의 서적도 기증목록에 올라와 있다.

기증자 심재온의 조부인 심상복(1876~1951)의 문집 '치당집(恥堂集)'을 비롯, 한말 이후 일제시대 이 지역 유학자인 김복한의 '지산집(志山集)', 이택환의 '회산집(晦山集)'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서적들의 60% 가량은 기증 목활자로 찍은 것이어서 결국 목활자 새기기에서 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유물이 망라된 셈이다.

한편 지방의 목활자들은 만든 시기와 글씨를 쓴 사람, 활자로 간행 한 책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증된 활자의 경우 심상복이 자본(字本)을 쓰고, 각수 김명곤이 하루에 1천개 가량의 글자를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제작자가 분명하다.

또 심상복은 단순한 인쇄업자가 아니라 최익현, 이도복의 가르침을 받은 노론계열의 유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서적 들을 통해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부 경남지역 유학자들의 교육활동과 학문세계도 유추할 수 있다.

기증 유물의 학술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29일 오후 2시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목활자와 경남 지역의 목활자 인쇄문화', 이상필 경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청송심씨 가장(家藏) 고서적의 성격'을 주제로 특강을 열었다.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낸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간행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

     1. 남몽뢰(1620-1681)가 지은 『구소수간초선』의 발문

  이상은 구양공(歐陽公:歐陽修)과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서간집이다. 누가 뽑아 엮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뽑은 것을 보면 가장 그 요체를 얻었다고 하겠다. 대개 그 작은 편지의 간요하면서도 또 간요한 것을 취한 것이다.
  내가 옛날 서울에 있으면서 이 책을 친구 집에서 빌려 보다 다 읽지 못한 상태에서 책 주인이 독촉해 돌려주었으므로 늘 한스러워하였다.
  신해년(1671,현종12) 가을에 나의 벗 진사 정홍현(鄭弘鉉 1621-?)이 나를 함양 임소로 찾아와 이 책을 소매 속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완연히 옛 상태 그대로여서 완상하여 마지 않았고 책 상자 속에 간직하며 관심을 놓지 못하였다. 동호인들과 함께 하고 싶어 널리 전할 길을 도모하였지만 또 그 힘이 미치지 못함을 한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마침 『양촌문집 陽村文集』 중간 역사가 있었으므로 인하여 각수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
  구양공 편지는 모두 47 편(문집 9;21에는 49편이라 함)이고 소동파 편지는 모두 95 편이니 합계 142 편(문집에는 144편이라 함)이다. 어떤이가 그것이 너무 적다고 탓하므로 내가 응수하기를 "어찌 많은 것을 추구하겠는가. 절조(折俎:조각구이)가 비록 체천(體薦:통구이)에 미치지 못하나 사금도 반드시 모래를 이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문단의 .일례이니 어찌 많은 것을 추구하겠는가." 하니 어떤이가 내 말을 그렇다고 여기며 나로 하여금 그 전말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 사이에 감히 평론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갑인년(1674,현종15) 3 월 초하루 영양(英陽) 남몽뢰는 적다.

     2. 남몽뢰의 생애와 저술

  이계(伊溪) 남몽뢰는 자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 본관은 영양으로 저서에 『이계집 伊溪集』과 『이계속집 伊溪續集』이 있다. 광해군 12 년(1620)에 의성군에서 태어나 숙종 7 년 (1681)에 별세하였다. 이계는 23 세 때인 인조 20 년(164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2 세 때인 효종 2 년(1651)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52 세 때인 현종 12 년(1671) 4 월에 함양군수로 부임하고 흉년으로 아사하는 유민들을 진휼하여 이듬해 봄에 구황 치적 제일로 준직(準職)의 명을 받았다. 준직이란 품계에 해당하는 직책을 가리킨다. 54 세 때인 현종 14 년(1673) 2 월에 진주목사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구소수간초선』을 간행하고 발문을 지었다. 숙종 1 년(1675) 겨울에 병을 이유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인이 몰락한 경신환국(1680,숙종6) 3 월 61 세 때 의금부에 하옥되고 이듬해 겨울에 전남 고흥군에 귀양갔다가 열흘 만에 다시 압송되어 11 월 15 일에 남원시에 이르러 별세하였다. 관이 함양을 지날 때 선정비를 세웠던 함양 주민들이 남녀노소 없이 통곡하였고 상여 줄을 잡는 이도 있고 제사를 지내는 이도 있었다.
  이계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구소수간초선』을 전해준 정홍현(1621-?)은 『사마방목 司馬榜目』에 보면 인조 26 년(164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자는 원길(元吉), 본관은 동래, 성주군에 살았다. 이계는 함양에 있으며 흉년을 구제하느라 이 책을 간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계는 함양군수로 부임한 뒤 그 1 년전(1670,현종11)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대전시 동구 중리동의 유형문화재 송애당(松崖堂) 주인으로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동문인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 1596-1653)의 아들인 김진수(金震粹 자는 晦叔)와 초면으로 친해져 자주 왕래하였다. 현종 13 년(1672) 5 월에 안음현 관아 밖 대숲 속에 관덕정(觀德亭)을 짓자 같이 활쏘기도 하며 그 기문을 짓기도 하였다. 그해 9 월에는 자기의 외삼촌인 권창업(權昌業 1600-1663)의 묘표를 우암선생에게 부탁하여 짓게 (송자대전 198권 번곡처사樊谷處士 권공창업묘표, 이계집 5권 처사권공묘광명墓壙銘) 하였고, 함양의 선비 양석번(梁錫蕃)이 춘와(春窩)란 서실을 짓자 그 기문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계집』은 6권 3책, 목판본으로 증손 남성천(南聖天) 등에 의하여 정조 2 년(1778)에 간행되었고, 『이계속집』은 3권 2책, 목판본으로 10세손 남우룡(南佑龍) 등에 의하여 1937 년에 경북 의성군 점곡면 윤암동에 있는 이계의 유적지인 이계당(伊溪堂)에서 간행되었다. 다만 이 문집에는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교류한 사적은 기재하지 않았다.

     3. 함양군수 남몽뢰에게 보낸 우암선생의 답신 --임자(1672,현종13) 9월 10일

  권처사(權處士 명은 昌業)의 묘표는 당시에 매우 참람한 짓인 줄 알면서도 또한 감히 부탁하신 정중한 뜻을 저버리지 못하여 억지로 초하여 바쳐서 취사 선택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하교하신 뜻을 받드니 칭찬이 실제에 지나치고 표현이 너무도 겸손하기에 내 자신 부끄럽고 송구함이 더욱 더하여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인하여 잘못을 지적하며 새로 고치도록 하시니 또 어진 군자의 두터운 마음씀을 볼 수 있었는바 일자지사(一字之師)일 뿐만이 아닙니다. 깊이 명심하여 다시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삼가 분부에 따라 개정하겠습니다. 그밖에 고친 것도 여러곳입니다.
  대개 당시에 바쁘고 어지러워 전혀 자세히 못하였습니다. 『소학 小學』 선행편(善行篇)에서 장관(張觀)이 말한 "바삐 하면 그릇된다"는 경계를 가슴에 새기지 않아서입니다. 송구합니다. 묘표의 초본은 행장과 함께 반납합니다. 그 초본은 뒤에 안음현감 편에 도로 보내주시거나 따로 한 본을 베끼어 돌려주셔도 좋겠습니다. 대개 집에 초고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집 애들이 구하고자 해서입니다.

      4. 『구소수간』에 얽힌 이야기

  『구소수간 歐蘇手簡』은 세종대왕이 세자 시절에 많이 읽은 책이다. 세종이 책을 좋아해서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책을 열심히 읽자 태종은 명을 내려 책을 전부 치워버리게 했다. 그런데 『구소수간』이 우연히 책상 옆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세종은 이 책을 1천 번이나 읽었다는 것이다. 『명종실록』에 이 일화가 실려 있다. 이 『구소수간』은 임진왜란 이전에 청주, 홍주, 곡산, 예천 등지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서울대 등에 남아 있는데 4 권 1 책이고 분량은 78 장이다. 그런데 남몽뢰가 간행한 책은 같은 목판본이라도 불분권이고 50 장이며 간(簡)자도 간(柬)으로 되어 있고 초선(抄選)한 것이니 원본에서 뽑아 엮은 것인데 남몽뢰도 초선자를 알지 못하였다. 산기 이겸로 저 『통문관책방비화』 참조. 산기선생은 임란 이전본과 현종 진주간본을 언급했는데 이 외에도 다른 판본이 있다.
  무신년(1908?)에 활인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은 부계 예씨(芮氏)들이 간행한 것이다. 옥주(沃州:옥천)에서 『구소수간』 사본을 예병기(芮丙基)가 구해오자 예대훈(芮大塤)이 인행하고 예대희(芮大僖)가 발문을 지었다. 이 발문에선 세종대왕이 이 책을 만 번을 읽었다고 하였다. 예대훈이 약간 편집을 가하였다. 일본에서도 『구소수간 歐蘇手簡』이 간행되었다. 1780 년의 축상(竺常) 서문본은 4 권 1 책으로  두인걸(杜仁傑)의 원서가 있다. 1797 년에는 일본의 송본유헌(松本幼憲)이 후편을 엮어 경조(京兆)의 방각본 서사(書肆)인 임권병위(林權兵衛)가 간행하였는데 또 축상이 서문을 지었다. 이 2 책이 한 질이 된다. 한국에서 임란 이후에 유행한 『구소수간초선』은 함양군수 시절에 구해놓고 간행하려다 못한 남몽뢰가 진주목사로 전임한 뒤 간행한 것이니, 함양과 인연이 깊은 책이라고 하겠다.

안국사 승려가 간행한 소아과 전문의서 『보유신편(保幼新編)』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가 지은 『보유신편(保幼新編)』 서문

 경(經)에 이르기를 "차라리 열 명의 어른은 고칠지언정 한 명의 어린이는 고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대체로 어린이는 오장 육부가 취약하고 기혈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경락과 맥과 숨이 여리기가 가는실 같아서 허해지기도 쉽고 실해지기도 쉬우며 금방 냉했다가 금방 실해지기도 한다. 입으로는 증상을 말하지 못하고 손으로는 아픈 곳을 가리키지도 못한다. 참으로 바른 처방을 상고하여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치료에 임하는 사람이 헷갈려 마침내 속수 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얘기는 그만두자. 나 자신이 거듭 아이들의 참척을 겪고나서 마음으로 늘 가슴아파하였다. 작년 가을에 안국사(安國寺) 승려 정훈(正訓)이 소매 솎에 한 권의 책을 넣고 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명나라 무기선생(無忌先生) 성모(成某;이름은 전해지지 않음)가 지은 『보유신편』입니다. 증상을 논한 것과 처방을 만든 것이 가장 상세하고 구비되었지만 세상 의사들이 실속없는 책으로 보고 못쓰는 종이에 전하니 저는 오래지나면 없어질까 염려하여 가진 재산을 다 털어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선생은 한마디 말씀을 적어주시어 책머리에 올리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의학에는 실로 문외한이라 그 학설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거기다 쇠약하고 병들어 고생스럽게 해를 보내느라 글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요사이 옛 책상자 속에 있던 그 책을 한가로이 열람해보니 대개 그 학설은 옛 의경(醫經)에 근원한 것이며 새 처방을 붙인 것이었다.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요긴한 것만 뽑아놓았으니 방대하여 찾기 어려운 걱정이 없었다. 운기(運氣)와 오행(五行)을 참고하고 음양과 일시를 살피어 증세에 맞추면 바로 효험이 있는 것이 마치 신표를 맞추는 것과 같았다.
 지금 널리 유포될 길을 얻었으니 집집이 소장하고 사람마다 외운다면 비록 처방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면 분명하여 때에 맞추어 약제를 써서 어린이로 하여금 다 죽어가다가도 되살아날 수 있게 함으로써 함께 자비의 배를 타고 같이 장수나라에 들어가게 할 것이다.
 대개 유교가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그들이 허무(虛無) 적멸(寂滅)에 공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넉넉지 못한 처지면서도 심력을 다하여 백성을 장수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였으니 우리 유가가 못한 것을 승려로서 해냈다고 누가 말해줄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해 더욱 늦게 본 것을 애통해하며 미안한 마음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서문을 쓴다.

 헌종 11년(1845) 칠석날 물재병부(勿齋病夫) 노광리(盧光履1775-1856,당시 71세) 짓다.

 이 글은 노광리의 문집과 『보유신편』 간본에 실려 있는데 문집에는 연대 표기가 없고 간본에는 안국사란 말이 삭제되었다. 보유신편의 안국사 초간본은 성주(星州)에서 간행되었고 성주개간본에는 노광리의 서문이 없고 노서본(盧序本)은 또 성주개간의 간기가 삭제되어 있다. 이로 보아 성주 초간판을 함양의 안국사로 옮겨온 뒤 노광리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보각하고 함양에서 계속 인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유통본은 대구의 방각본(민간상업출판물) 업자이던 재전당서포(在田堂書鋪)의 김기홍(金璂鴻)이 1909년에 간행하고 1913년에 중간한 것으로 이 본이 널리 유통되었다.
 안국사는 성주의 독용산성(禿用山城)에도 있고 함양 마천의 금대암 가는 길에도 있는데 함양 안국사는 조선조 태종 때 선종(禪宗) 판사(判事)인 행호조사(行乎祖師)가 창건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세종 20년(1438) 7월 2일에 환관 배훤을 보내어 함양에 가서 중 행호를 불러오게 하였다고 하였다. 세종 30년(1448) 7월 18일에 행호가 세종 28년(1446) 3월 24일에 서거한 세종왕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법주(法主)가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고 언급하였으니 행호는 세종 28년이나 29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안국사에는 행호조사의 부도탑으로 추정되는 은광대화상(隱光大和尙)부도가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헌종 11년(1845)에 『보유신편』을 간행한 정훈(正訓)은 사적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보유신편』을 보면 첫머리에 서문, 목록, 범례가 있고 운기유행법, 소아병론총론 이하 태열을 필두로 소아 질병의 각종 증상에 대한 처방이 실려 있다.

  

 국역 천령지 天嶺誌 서문

 *邑之有志古也 고을에 읍지가 있는 것은 옛날부터이다. 嘗觀人事之强弱民風之淳요水+堯 일찍이 인간사의 강약과 민풍의 순수,투박함을 보건대 係於水土之淺深厚薄 수토의 천심과 후박에 매였더라. 俊乂之挺生 준걸이 태어나거나 財寶之興産 재물이 생산되는 것은 由乎地靈之亭植胚胎 땅 영기의 심거나 기름에 말미암는다. 至於館宇以待賓 관사로써 손을 대접하고 城池以禦侮 성으로써 침입을 막고 藪澤以利用 연못으로써 이용하고 關防以設固 요새로써 견고하게 지키니 邦家所永賴者 국가가 길이 의지하는 것이다. 而皆不可以不記 그러므로 다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則志之作夫豈得已乎 그렇다면 읍지의 찬술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國家輿地勝覽規模 나라의 여지승람의 규모는 一倣大明一統志爲之 한결같이 대명일통지를 본떠서 만들었다. 則三韓之鼎峙 그래서 삼국의 대치한 형세와 八路之碁布 팔도가 펼쳐진 형국과 百城之魚鱗 백여 개의 성벽이 줄지어 늘어선 형편을 可一閱而盡者 한번 보고서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今世家頗有之 지금 대갓집에는 상당히 가지고 있다. 而부衣+臼輯一邑之山川風土人傑物華 한 고을의 산천과 풍토와 인물과 물자 자료를 수집하여 別爲一帙 따로 한 질을 엮어 以便觀覽 관람에 편케 한 것으로는 若范石湖所纂吳郡志外 범석호가 엮은 오군지 외에는 鮮有作者焉 지은이가 드물다.
*從祖竊慨於斯而作天嶺志 종조가 이에 대해 은연히 개탄하고 천령지를 지었다. 天嶺吾鄕也 천령은 우리 고향이다. 以言乎名宦 명관을 말한다면 崔學士之偃仰風敎 최학사가 한거하며 풍교를 편 것이나 金점人+占畢之興學遺愛 김점필재가 학교를 일으키고 사랑을 끼친 것이 있고 以言乎形勝 형승을 말한다면 頭流磅박於前 지리산이 앞에서 웅장하고 뇌람經緯乎中 뇌계천과 남계천이 가운데에 종횡으로 흐르는 것이 있다. 禮俗之篤 예의 풍속이 독실한 것이나 土地之유月+臾 토지가 비옥한 것이나 物産之豊 물산이 풍부한 것이나 人材之富 인재가 많은 것이나 불冕之盛 벼슬아치가 풍성한 것은 在古蓋甲于嶺右矣 옛날에 있어 영남에서 으뜸이었다.
*自我先祖一두先生闡明性理爲斯文倡 우리 선조 일두선생께서 성리학을 천명하여 유교의 선구자가 되신 뒤로부터 繼而道德儒雅文章鉅公 이어서 도덕의 선비와 문장의 대가가 蔚然輩出 성대히 배출되었으니 則以文獻之邦 문헌의 고장으로 見推於一道 한 도에 추앙받은 것이 而尤莫有比肩者 더욱 비견할 곳이 없었다. 然而變亂之屢經 그러나 변란을 여러번 겪고 風氣之寢薄 풍기가 점점 박해져 陵夷至于今 점점 지금의 형세에 이르렀고 彷彿乎古昔者 옛날에 비슷한 것은 什無二三焉 열에 한둘도 없다. 所可徵者 고증할 수 있는 것은 山水之周遭 산수가 둘러 있는 것과 基址之流傳 터가 전해지는 것과 題詠之稱誦而已 시가 읊조려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從祖旣已涉其流而溯其源 종조가 이미 그 원류를 추구하고 參之古而驗之今 고금을 참고하여 網羅舊聞 옛 견문을 망라하고 搜剔遺事 빠진 일을 수집하였다. 其建置沿革標榜名目 그 건치 연혁과 표제 항목은 則不出勝覽大要 여지승람의 대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而於人物軌탁足+蜀 그러나 인물 자취에 대해서는 獨加詳焉 유독 더욱 상세히 하였다. 孝悌忠烈隱遁高趣 효제와 충렬과 은둔자의 고상한 취향에 대해서는 尤致謹而備錄之 더욱 삼가고 갖추 기록하였다. 以至一言一行一才一藝之在人耳目者 말 한 마디 행적 한 편, 재주와 기술 한 가지라도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는 것은 未不具載 다 기재하지 않은 법이 없었다. 盖非猝然朝夕之工夫 대개 갑작스런 하루아침의 공부가 아니니 而其用心亦勤矣 그 마음씀이 또한 부지런하였다.
*書始成 책이 비로소 이루어지매 藏之협사竹+司 상자 속에 간직하고 不欲以示人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지 않았다. 旣久不能隱 이미 오래되자 숨길 수 없어 稍爲人所取觀 점점 사람들이 빌려보게 되었다. 則終不敢自私 끝내 감히 스스로 사장하지 못하고 屬余序以弁其首 내게 서문을 부탁하여 그 첫머리에 놓게 하였다. 余謂志非待序以傳者 나는 천령지는 서문을 기다려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若夫從祖好古懷土之天性 종조의 옛날을 좋아하고 고향을 생각하는 천성과 尙賢嗜善之至誠 현인을 숭상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지성은 當於志觀 천령지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而非余序亦莫之發也 그러나 나의 서문이 아니라면 또한 밝힐 수 없을 것이다.
*從祖名秀民字子賓 종조의 이름은 수민, 자는 자빈이다. 旣老自謂東里居士云 이미 늙자 스스로 동리거사라고 하였다.
*時龍集丁酉 효종 8년 1657 仲秋旣望 8월 16일 河東後人鄭光淵 하동후인 정광연(호는 滄洲창주 1600-?) 書于羅村之百용心+庸軒 나촌(수동면 효리)의 백용헌에서 쓰다.

※ 천령지의 저자인 춘수당 春睡堂 정수민 鄭秀民 1577-1658 의 유적지로는 지금 수동면 우명리 일두선생묘소 입구에 춘수정 春睡亭과 경내에 벽사 이우성 교수가 지은 유적비가 있고 일두묘소 위쪽에 춘수당 산소와 묘비가 있다. 서문을 지은 창주 정광연은 일두선생의 현손인 송탄 정홍서 松灘 鄭弘緖 1571-1648 의 차남으로 그의 유적지로는 효리 입구에 구남정사 龜南精舍가 있는데 동실은 동봉재 東峰齋, 서실은 창주재 滄洲齋이다. 동봉은 창주의 손자인 충신 정희운 鄭熙運이다. 유림면 대궁리 감모재 앞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지은 창주의 묘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