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시

번역문

번역소설

함양학논문


 함양구경

제1경. 지리산벽송사

제2경. 인산초당

제3경. 상림

제4경. 남계서원

제5경. 일두고택

제6경. 연암실학촌

제7경. 농월정

제8경. 용추폭포

제9경. 덕유산영각사

 

제1경. 지리산벽송사 23편

*벽송암에서

*벽송암의 성안선사에게 주다

*의탄촌

*금대사에서

*안국사 승려가 간행한 소아과 전문의서 『보유신편(保幼新編)』

*군자사 산영루

*군자사의 미나리밭에는 개구리가 없다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략)

*운학정

*영원사에 투숙하다.....어우 유몽인

*지리산 영원사 설파당탑

*상무주암

*원정동

*용유담에 시를 지어 던지다

*휴천면 문정리 도정정사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

*법우화상(法祐和尙)

*엄천사 종각 상량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관영 차밭(官營茶園) 조성터(造成址) 기념비

*함허정에서

*함양군수 최한후가 간행한 황산곡시집의 책판을 후임 최연손이 불태우다

*등구창촌(登龜倉村) - 우담 정시한의 지리산과 덕유산 유람 - <산중일기>

*지리산 천왕봉

제2경. 인산초당 6편

*인산초당

*인산 애송시

*등구사

*오도봉에서

*오도재 죽염골

*2007 三祝 紀念詩

제3경. 상림 21편

*대관림(大館林: 상림의 고칭)

*위성 장림

*사운정

*가곡상림

*군수 조후 병갑 청덕 선정비

*함양 학사루

*학사루 주련

*학사루에서 임진왜란 격문을 초한 대소헌 조종도

*학사루에서 간행한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

*위성관 모선 설화

*함양동헌 모란

*함양동헌 대나무

*청향당.....뇌계 유호인

*차운하여 종이를 선물한 동년(同年:문과 급제 동기)  함양 수령 이항무(李恒茂)에게 사례하다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낸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간행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

*함양향교-모재 김안국

*신약당

*고대가 지은 부음정(孚飮亭) 헌수시

*백사정

*서계창수

*덕봉사에서

제4경. 남계서원 20편

*남계서원

*남계서원 참배

*청계정사

*숙야재에서 주역을 읽다

*강참봉 만사

*일로당 제영 차운

*구졸재의 사위 처가살이 내암 정인홍

*내암 정인홍이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인 11세 시절(1546,명종1) 지은 「영송(詠松)」

*탑 솔

*대고대 친족 모임

*대고대의 바위 수난

*망북정(望北亭)의 남계(藍溪) 임희무(林希茂, 1527년1577년)

*진극인 만장

*연봉음

*사근산성

*사근역 수수정

*월명총-점필재

*월명총-뇌계

*월명총-태촌

*만덕총-태촌

제5경. 일두고택 9편

*일두고택

*정일두 노옥계 집터 - 우담 정시한의 지리산과 덕유산 유람 - <산중일기>

*신고당 노래

*남명이 옥계에게 회답한 서신

*옥계의 남명 만장

*추담정사

▵천령지(天嶺誌) 서문.....춘수당 정수민

*승안사 회고

*일두선생묘소 제문

제6경. 연암실학촌 6편

*연암실학촌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의 해인사창수시서(海印寺唱酬詩序)

*성천서원을 이건하고

*광풍루에 올라

*안음향교

*용문서원 춘추 향축문

제7경. 농월정 8편

*농월정

*농월정 련구

*숭례문과 농월정

*거연정

*용유담

*황석산성

*남명선생 안의 화림동(농월정 계곡) 유람 시

*안의삼동과 대전거제철도선

제8경. 용추폭포 10편

*용추폭포

*장수사 폭포 구경

*심진동 용추계곡 초입

*심원정에 올라

*심진동

*무진송

*문곡대사 진영찬

*장수사 문곡지탑

*덕유산 심진동 장수사 용추암 연혁

*은신암에서

제9경. 덕유산영각사 6편

*영각사에 이르러

*먼저 영각사에 이르러 벗을 기다리며

*영각사 동학란 일기

*육십령에 올라

*육십령을 넘으며

*대로마을 동춘장구소 석각

부록.

함양역사연표

고운과 인산

**고운선생(孤雲先生) 천령태수편(天嶺太守篇) - 인산 김일훈 선생 어록

**함양 대화록 - 인산 김일훈 선생 어록

함산 김윤수 운문

 **상림의 노래

**무진미술관 예찬

 

제1경. 지리산벽송사

 

         벽송암에서   題碧松庵

 

                     상월 새봉(霜月璽封, 1687~1767)

 

方丈之庵眞寶界   방장산의 암자는 참으로 보배로운데

暫時棲息遠塵勞   잠시 머물며 세속의 먼지 멀리 하네

川憂海渴長年注   냇물은 바다 마를까 영원히 흐르고  

山畏天傾萬丈高   산은 하늘이 기울까 만 길이나 높네

栢樹風淸禪語定   조주의 가풍 맑아 화두를 참구하고

蓮池月皎客吟騷   연못에 달밝아 객은 시를 읊조리네

壺中自有無窮興   골짜기에 저절로 무궁한 흥취 있으니

豈羨功名一世豪   일세 호걸의 공명을 어찌 부러워하랴

 

           벽송암의 성안선사에게 주다    贈惺岸禪師                    

                                                        師在方丈山碧松菴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 1710.4.26~1760.8.15)

 

余愛岸師高   나는 스님의 고상함을 사랑하니

由樸入脫解   소박함에서 해탈에 이르렀네

冷官呼不至   고을 수령이 불러도 오지 않고

難經讀便罷   어려운 불경을 읽고야 마는구나

過余寒竹館   나의 한죽관으로 방문하여

抗言在義禮   의리와 예의에 대해 얘기하네

移阡營父葬   부친의 묘자리 옮겨 안장하고

訟官爲門弟   동생을 위해 관아에 송사하네

出家篤人倫   출가했어도 인륜에 도타우니

中心誠愷悌   속마음은 참으로 단아하다네

無以儒釋分   유가든 불가든 분간하지 아니하고

贈詩戒衰世   시를 주어 쇠퇴한 세상을 경계하네

 

                      의탄촌   義呑村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老翁積稻過茅簷   늙은이는 처마 밑까지 나락을 쌓고

黃犢蹊田叱小男   젊은이는 골짝 밭에서 송아지 모네

削得烏椑曬溪石   감 껍질을 벗겨 냇가 바위에 말리고

紅光橫逗斷橋南   붉은 해는 외다리 남쪽에 걸리었네

 

                금대사에서   次 大虛 遊㵢溪詩                  

 

                          뢰계(뢰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頭流秋氣橫翠微   두류산 가을기운 산허리 감돌고

咸陽百結香粳肥   함양군 들녘에는 나락도 알차네

人生到此易感傷   온고을에 누런 낙엽 흩날리는데

一縣黃落㲯毿飛    인생이 이에 이르러 애달파지네  람監+毛

白沙亭畔水如練    백사정 가 물결은 흰 비단인 듯

乘興物外都忘機    세상 밖 흥에 겨워 세사를 잊네

林中有客人不會    숲속의 나그네를 사람들은 모르니

露頂篢子抛漁磯    맨머리 하고 삿갓은 바위에 두었네

山家飣餖只鮭菜    산골 집 차린 것은 나물 반찬뿐

野炊一抹煙霏霏    한데서 불때니 연기만 모락모락

白水靑山不盡情   푸른 산 맑은 물 못다한 정

西風十里斜陽暉   십리 부는 하늬바람 석양빛

你與平生好薄遊   그대와 평생 동안 유람을 즐겼는데

十年聚散空依稀   십년을 만났다헤어졌다 아련하구나

看山看水送此生   산 보고 물 보고 이 삶을 보내며

不管人間多是非   인간세계 많은 시비 관여치 않네

金臺寺北松桂瘦   금대사 북쪽 야윈 소나무 계수나무

夜夜山月紛相依   밤마다 산 달이 어지러이 걸려있네

萬木聲酣一逕小   만 그루 나무 소리 좁은 오솔길

明朝款段山中歸   내일아침 나귀 타고 돌아가리라

 

 역주: 백사정(白沙亭)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봄 찾아 술 싣고 외로운 마을 지나니, 뻐꾸기 소리 들리는 대낮에 사립문 닫았네. 비 뒤에 떨어진 꽃이 물에 떠 오니, 인간 어느 곳도 도원(桃原) 아닌 곳 없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안국사 승려가 간행한 소아과 전문의서 『보유신편(保幼新編)』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가 지은 『보유신편(保幼新編)』 서문

 

 경(經)에 이르기를 "차라리 열 명의 어른은 고칠지언정 한 명의 어린이는 고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대체로 어린이는 오장 육부가 취약하고 기혈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경락과 맥과 숨이 여리기가 가는실 같아서 허해지기도 쉽고 실해지기도 쉬우며 금방 냉했다가 금방 실해지기도 한다. 입으로는 증상을 말하지 못하고 손으로는 아픈 곳을 가리키지도 못한다. 참으로 바른 처방을 상고하여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치료에 임하는 사람이 헷갈려 마침내 속수 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얘기는 그만두자. 나 자신이 거듭 아이들의 참척을 겪고나서 마음으로 늘 가슴아파하였다. 작년 가을에 안국사(安國寺) 승려 정훈(正訓)이 소매 솎에 한 권의 책을 넣고 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명나라 무기선생(無忌先生) 성모(成某;이름은 전해지지 않음)가 지은 『보유신편』입니다. 증상을 논한 것과 처방을 만든 것이 가장 상세하고 구비되었지만 세상 의사들이 실속없는 책으로 보고 못쓰는 종이에 전하니 저는 오래지나면 없어질까 염려하여 가진 재산을 다 털어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선생은 한마디 말씀을 적어주시어 책머리에 올리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의학에는 실로 문외한이라 그 학설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거기다 쇠약하고 병들어 고생스럽게 해를 보내느라 글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요사이 옛 책상자 속에 있던 그 책을 한가로이 열람해보니 대개 그 학설은 옛 의경(醫經)에 근원한 것이며 새 처방을 붙인 것이었다.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요긴한 것만 뽑아놓았으니 방대하여 찾기 어려운 걱정이 없었다. 운기(運氣)와 오행(五行)을 참고하고 음양과 일시를 살피어 증세에 맞추면 바로 효험이 있는 것이 마치 신표를 맞추는 것과 같았다.

 지금 널리 유포될 길을 얻었으니 집집이 소장하고 사람마다 외운다면 비록 처방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면 분명하여 때에 맞추어 약제를 써서 어린이로 하여금 다 죽어가다가도 되살아날 수 있게 함으로써 함께 자비의 배를 타고 같이 장수나라에 들어가게 할 것이다.

 대개 유교가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그들이 허무(虛無) 적멸(寂滅)에 공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넉넉지 못한 처지면서도 심력을 다하여 백성을 장수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였으니 우리 유가가 못한 것을 승려로서 해냈다고 누가 말해줄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해 더욱 늦게 본 것을 애통해하며 미안한 마음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서문을 쓴다.

 헌종 11년(1845) 칠석날 물재병부(勿齋病夫) 노광리(盧光履1775-1856,당시 71세) 짓다.

 

 이 글은 노광리의 문집과 『보유신편』 간본에 실려 있는데 문집에는 연대 표기가 없고 간본에는 안국사란 말이 삭제되었다. 보유신편의 안국사 초간본은 성주(星州)에서 간행되었고 성주개간본에는 노광리의 서문이 없고 노서본(盧序本)은 또 성주개간의 간기가 삭제되어 있다. 이로 보아 성주 초간판을 함양의 안국사로 옮겨온 뒤 노광리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보각하고 함양에서 계속 인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유통본은 대구의 방각본(민간상업출판물) 업자이던 재전당서포(在田堂書鋪)의 김기홍(金璂鴻)이 1909년에 간행하고 1913년에 중간한 것으로 이 본이 널리 유통되었다.

 안국사는 성주의 독용산성(禿用山城)에도 있고 함양 마천의 금대암 가는 길에도 있는데 함양 안국사는 조선조 태종 때 선종(禪宗) 판사(判事)인 행호조사(行乎祖師)가 창건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세종 20년(1438) 7월 2일에 환관 배훤을 보내어 함양에 가서 중 행호를 불러오게 하였다고 하였다. 세종 30년(1448) 7월 18일에 행호가 세종 28년(1446) 3월 24일에 서거한 세종왕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법주(法主)가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고 언급하였으니 행호는 세종 28년이나 29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안국사에는 행호조사의 부도탑으로 추정되는 은광대화상(隱光大和尙)부도가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헌종 11년(1845)에 『보유신편』을 간행한 정훈(正訓)은 사적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보유신편』을 보면 첫머리에 서문, 목록, 범례가 있고 운기유행법, 소아병론총론 이하 태열을 필두로 소아 질병의 각종 증상에 대한 처방이 실려 있다. (함양문학 8호, 1999.12.01)

 

                      군자사 산영루    君子寺 山映樓  

 

                                 저촌(樗村) 심육(沈錥, 1685~1753)

 

傾身踰大嶺   몸을 기울여 큰 고개 넘으니

帖息卧高樓   숨이 차 높은 누각에 눕네

側想藍輿疾   가마 탐이 빠른 걸 생각하며

潛驚啣繫憂   말고삐 묶을 걱정에 놀라네

懸崖方騁力   낭떠러지에서 힘을 다 쏟고

平地却回頭   평지에서 고개를 돌려 보네

山水浮遊樂   산천을 떠돌며 노는 즐거움

從今老可休   이제부터 늙어서 쉬어야하리

 

군자사의 미나리밭에는 개구리가 없다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1623)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태촌집泰村集 제5권》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지음

  ※군자사는 신라 진평왕이 숙부 진지왕이 서기 576년 즉위함으로 인하여 도성을 떠나 이곳에 피신, 은거한 별궁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된 뒤 도성에 돌아가 즉위하고 이곳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군자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은 딸만 성장하여 선덕여왕이 되었다.

 

금대암 아래 바위 석각

古諺傳眞平王

入此山時聽封

次占此而其后

居人皆以禁地云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략)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천령의 남쪽  50리쯤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 아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 대건(태건) 11년(579 무술(578) 신라 진평왕(579~632재위) 이 잠저 시절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고서 서울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것으로 이름지었다. 그뒤로 여러번 병화를 만나 흥폐를 거듭하였다. 고려조 경원 4년 무오(1198)에 불일보조국사가 이 산 상무주암에 거하며 전심하여 수도하였다. 얼마 안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다가 내려가는 길에 이 옛 터를 보고 절을 영건하려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이듬해 법을 이은 승려 진각국사에게 명하여 내 뜻을 잘 이어 가서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그 영수로하여금 먼저 불당을 신축하고 점차 승당을 완성하게 하였다. 국사가 대중에게 고하기를 "절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내 어찌 감히 오래 머무르랴" 하고 그 문제자 신담에게 여기 주석하게 하고 금대암으로 물러나 거하다가 단속사로 이거하였다. 이윽고 세상에 변화가 많아 절도 흥폐한 지 오래되었다. 연우 4년 정사(1317) 혜통화상이 이 절에 이르러 널리 수리하고 중건하였다.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누차 왜란을 당해 절도 불탔다. 홍무 37년 갑신(1404, 조선 태종 4)에 천태종 영수 행호대선사가 널리 개척하고 신축하여 옛 모습보다 더욱 웅장하게 하여 법당과 장판각 등이 완비되었다. 강희 19년 경신(1680, 숙종 6)에 선사 순일이 옛 누각을 중건하고 신관 도인이 개와를 새로 하였으나 단청은 하지 못하였다. 갑자(강희 23년, 1684, 숙종 10) 봄에 통정 태감법사가 단청하였다. 강희 23년(갑자, 1684)에 방장산 승려 형곡 복환이 쓰다.

天嶺之南五十許里。有智異山。智異之東麓下大溪邊。有君子寺。陳大建十一年戊戌。新羅眞平王潛邸。避位居此。因生太子而還國。遂捨家爲寺。以是名焉。自爾厥后。荐遭兵燹。或興或廢。曁于麗朝慶元四年戊午。佛日國師來。止此山上無住菴。專精內觀。未幾。將歸昇平之禪社。道由山下。見此遺基。將營寶坊。恨未遂願。越明年。卽命嗣法沙門眞覺國師曰。善繼吾志而往葺之。於是。國師使其領袖。先新佛宇。漸完僧寮。國師告衆曰。寺已成就。吾敢久留。令其門弟信淡。主席於斯。退居于金臺菴。又移於斷俗寺。旣而世多翻覆。寺亦興廢者久矣。延祐四年丁巳。慧通和尙。來到此寺。廣修重搆。爰自麗世之季。及至我朝之初。屢經島夷之陸梁。寺亦焚燬。洪武三十七年甲申。天台領袖行呼大禪師。丕拓新揆。彌崇舊制。像室經臺。無不克備。康煕十九年庚申。善士淳一韻釋。改舊樓而換新。信寬道人。善新瓦而棄舊。猶未丹雘。甲子春。通政太鑑法師。塗以黝堊。康煕廿三禩。方壺苾蒭荊谷復還書。<靑莊館全書卷之六十九 寒竹堂涉筆[下]>

 

                      운학정   雲鶴亭

  

                                   동계 조귀명

 

卸輿聊復坐   가마를 내려 다시 앉으니

餘興此翛然   여기에서 문득 여흥이 이네

石勢龜龍錯   돌 모양이 거북과 용 같으니

亭名雲鶴傳   정자 이름 운학이라 전하네

徘徊得意趣   배회하며 의취를 얻으니

瀟灑遠塵緣   시원하여 속연을 멀리하네

智異惟高峻   지리산은 오직 높고 험하니

玆潭却補愆   이 못이 그 허물을 보충하네

 

下山未至君子寺一里所。泉石殊開眼。石有蹲伏如龜而甲紋自然者。蜿蜒如龍而頭尾可指者。問之老僧。其東岸卽雲鶴亭故基。伯氏大書臥龍巖三字于石面。余又題詩曰。卸輿聊復坐。餘興此翛然。石勢龜龍錯。亭名雲鶴傳。徘徊得意趣。瀟灑遠塵緣。智異惟高峻。玆潭却補愆。非强抑揚語也。大抵奇壯不及龍游。蘊藉不如西谿。而兼撮二者之勝。<東谿集,遊智異山記>

 

하산하여 군자사 1리쯤 못 미치는 곳의 물과 돌이 눈에 번쩍 띄였다. 돌은 엎드린 모습이 마치 거북이 같아 등 무늬가 자연히 그러한 것이 있었고, 꾸불꾸불 용같아 머리꼬리가 분명한 것도 있었다. 늙은 중에게 물으니 그 동쪽 언덕이 운학정 옛 터라고 하였다. 큰형이 크게 와룡암 세 글자를 돌 위에 썼다. 나는 또 씨를 써붙였다. 운운. 억지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기이하고 장엄함은 용유담에 못 미치고 온화하고 중후한 것은 서계만 못하나 두 가지의 경승을 뽑아 겸하였다.

 

역주: 운학정은 서계창수를 지은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1521∼1591)이 지리산에 은거할 때 지은 정자이다. 매촌은 41세(1561년)에 마천동(馬川洞)에 운학정(雲鶴亭)을 지었다. 강익과 더불어 원원상종(源源相從)하였고, 도의로 강마하였다.

 

                   영원사에 투숙하다   投靈源寺 二首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

 

繚繞尋芳路   구불구불 향기 찾아가는 길

沿溪復越陵   시내 따라 다시 언덕 넘네

巖開自成广   바위는 절로 문을 이루고

松直孰施繩   소나무엔 누가 끈을 묶었나

詩卷同吾友   시 쓴 책은 나의 벗이고

藍輿仗爾僧   가마는 승려에게 의지하네

天王峰不遠   저 천왕봉은 멀지 않으나

猶隔白雲層   오히려 흰구름에 막혀 있네

 

  지리산 영원사 설파당탑

  설파대사비명 雪坡大師碑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어느 날 나는 일이 있어 우연히 도성 문밖으로 나갔더니 헤진 납의를 입은 중이 벽제하는 소리를 못 들은 듯이 갑자기 앞에 엎드렸다. 그 안색이 민망하고 급박한 사정이 있는 자 같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겨 너는 무엇을 하는 자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승은 호남의 중으로 성연(聖淵)이라고 합니다. 법사인 설파화상을 위하여 대인께 한마디 말을 얻고 거듭 시방의 중생을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나라에 금법이 있어 중은 도성에 들어갈 수 없고 정승 집에는 또 사사로운 정을 전달할 수 없기에 성밖의 여관에서 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름 지나 가을 되고 가을 지나 겨울 되어 쓰러져 죽는 것이 조석간에 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으렵니다." 고 하였다. 나는 뭉클하게 그 정성에 감동하여 그들이 지은 행장을 올리게 하였다. 행장은 다음과 같다.

  대법사의 이름은 상언(尙彦 1707~1791)이고 호남 무장현(茂長縣 :지금 고창군 무장면) 사람이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이다. 부친은 태영(泰英)이고 모친은 파평윤씨이다. 조실부모하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살길이 없었다. 19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투신하여 운섬(雲暹) 장로에게 머리 깍고 연봉(蓮峯)과 호암虎巖(체정體淨, 1687~1748 환성지안의 제자임) 두 화상에게 게송을 받았다. 또 회암(悔菴:정혜定慧 1685~1741) 스님에게 배웠다. 선종(禪宗)의 계보로 말하면 서산(西山)에게 7세손이 되고 환성(喚醒:지안志安 1664~1729)에게 손자가 된다. 33세에 대중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용추(龍湫) 판전(板殿)에서 강좌에 올랐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대단히 총명하였는데 여러 이름난 스님들을 참방함에 미쳐서는 불교의 진리에 대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즉시 이해하였다. 신묘한 이해는《화엄경》에 더욱 풍부하였다. 반복하여 공부한 것은 한강의 모래알 수처럼 많고 강송하는 소리는 꾀꼬리 울음같이 퍼지었다. 마침내 그 틀린 점을 바로잡고 그 귀취를 통일하여 근세 바보의 꿈 이야기같은 견해를 씻어 버렸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어 각각에게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였는데 그 설이 무궁무진하였다.

  옛날 청량대사(淸凉大師:징관澄觀?~839 중국 당나라 스님)가 《화엄경수소연의초》를 지었는데 그 뜻이 은미하여 강해하는 이들이 괴롭게 여겼다. 스님이 한번 보고 동그라미 쳐서 소(疏)니 과(科)니 표시하여 각기 귀결됨이 있게 하였다. 마치 나그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이윽고 승재와 부영 등이 스님에게 사뢰기를 "《화엄경소초》 가운데 인용한 것에도 틀리고 쓸모없는 것이 없지 않으니 어찌 해인사로 옮겨가 여러 판본을 고증하여 다른 점을 보충하지 않습니까?" 하자 스님은 가서 머물며 비교 고증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금강산에 유람한 것은 두 번, 묘향산 한 번, 두류산은 늘 참선하였다.

  영조 46년(1770)에 징광사(澄光寺: 순천시 낙안면 소재)에 불이 나서 소장되었던《화엄경》80권 책판이 다 소실되었다. 스님이 탄식하며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에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고 하였다. 그리하여 재물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그 불명확한 부분은 오직 스님이 입으로 외운 것에 의지하였다. 책판이 완성(영조 50년, 1774)된 뒤 새로 장판각을 영각사(靈覺寺: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소재)에 세워 보관하였다. 그 며칠 전에 호랑이가 절 뒤에서 땅을 후벼팠었고 승려의 꿈에서도 신이 고하기를 '이곳은 여래의 대경(大經)을 간직할 만하다.' 고 하였었다. 《화엄경》을 장판각에 봉안할 때 상서로운 빛이 공중에 서리니 모인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여겼으나 스님은 우연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뒤로 영각사에 우거하였다. 어느 날 주지에게 이르기를 "절을 이건하지 않으면 반드시 물에 무너질 것이니 어찌 도모하지 않는가?" 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큰 물이 져서 절이 과연 무너지고 승려들도 많이 빠져 죽었다. 그제야 대중들이 그 신통함에 감복하였다.

  노년에 영원사(靈源寺:함양군 마천면 삼정동 소재)에 들어가 죽을 각오로 염불로써 일과를 삼았다. 날마다 천 번 염불하는 것을 열 번 되풀이하였는데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정조 14년(1790) 섣달에 작은 병에 걸렸고 15년(1791) 1월 3일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이날 제자 27명이 받들어 다비하였다. 여러 고승이 달려와 통곡하였고 하계의 중생들도 서로 고하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일찍이 근세에 화장할 때 사리(舍利:화장한 뒤 남는 영롱한 구슬)가 나온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다비함에 미쳐 상서로운 빛이 7일 밤 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나 끝내 한 개의 사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교의 이치로 보면 있다는 것도 애초에 없다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애초에 있다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라고 해도 가하고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이라고 해도 또 불가할 것이 없다. 참으로 있고 참으로 없고를 누가 능히 분별할 수 있겠는가? 뭇 제자들이 그 정성을 기탁할 데가 없어 영원사에 부도를 세웠는데 선운사 승려도 그렇게 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머리를 깎은 것을 기념하여서이다.

  아, 스님은 한마디로 평가하면 화엄경의 충신이고 성연은 또 스님의 충신이다. 섬기는 대상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유가나 불가나 다를 것이 없다. 내가 명을 짓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겁의 후인들을 권장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스님이 임종시에 제자에게 당부하여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고 또 부득이하면 채상국(蔡相國)에게 비명을 청하지 않으면 불가하다고 한 경우이겠는가? 나는 스님을 모르는데 스님은 나를 잘 아니 의리상 저 버릴 수 없어 이에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불교에 《화엄경》이 있으니
바른 법이요 중요한 경전이라
누가 받들어 가졌는가
설파의 마음은 유구하다
불의 신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날뛰어 태웠는가
머리 속에 옮겨 간직했다가
저 책판에 올려 새기었다.
여래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길
나는 너를 훌륭히 여기노라
설파의 공덕에 대하여
나는 이와 같이 들었노라.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영조 때에 판서를 역임하고 정조 4년(1780) 이후 8년간 서울 근교 명덕산(明德山)에서 은거한 뒤 정조 12년(1788)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 후기 남인 정승으로 명재상이었다. 어릴 때 단성현감인 부친을 따라 산청에서 6년을 살아 그 인연으로 율곡사 승려 봉암대사(鳳巖大師의) 찬영문(讚影文)과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영각사에 간직되었던 《화엄경》 책판은 6.25 때 불탔다. 영원사에는 지금도 육각의 옥개석이 있는 장중한 모습으로 설파당탑이라 새겨진 부도가 남아 있다. (함양문학 제7호, 1998.12)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雪坡大師碑銘
 


日。余因事偶出郭門外。有弊衲僧如不聞呵道。突黑衣卒伏於前。其色若有悶急者然。余恠問曰。若何爲者。對曰。僧乃湖南沙門名聖淵者。爲法師雪坡和尙。願得大人一言重。以詔十方衆生。有邦禁也。僧不可以入都城。相門又不可以私情導達。乞城外旅店食。夏以秋秋以冬。僵死在朝暮。然不得所願。欲死無歸。余油然感其誠。許令進所爲狀。其狀曰。大法師名尙彦。湖南茂長縣人。國朝孝寧大君十一世孫也。父泰英。母坡平尹氏。早失怙恃。家甚貧無以自資。年十236_559c九。投禪雲寺。薙髮于雲暹長老。受偈於蓮峯虎巖兩和尙。又參晦菴丈室。以禪系言之。於西山爲七世孫。於喚惺孫也。三十三。因大象固請。陞座於龍湫板殿。師自幼穎悟甚。及參諸名師。三乘五敎。無不言下卽會其玅契神解。於華嚴尤篤。反覆則恒河計沙。講誦則迦陵遍音。卒能正其譌一其歸。以滌近世癡人說夢之見。願學者日以坌集。各示金繩覺路。其說纚纚不竆。在昔淸涼大師有所撰抄中䟽科。其義多隱晦。講解者病之。師一覽。圈而表之。曰疏曰科。各有攸宿。如客得歸焉。頃之。勝濟㫙穎等白師曰。大經抄中所236_559d引。亦無不衍誤。盍移錫海印。證諸本以補同異。師往留之。考較乃已。自是遊金剛者再。妙香者一。頭流常面壁焉。庚寅。澄光寺火。所藏華嚴八十卷板一無遺。師歎曰。於斯而不盡心。其敢頂禮如來。於是鳩財剞劂。人天助力。春始夏訖。其晦䵝者。惟師之口誦是賴焉。板旣完。新建閣峙諸靈覺寺傍。前數日。有虎跑寺後。僧又夢神人告曰。此可藏如來大經云。方經之安於閣也。有瑞光蟠空。會者咸異之。師以爲此偶然也已。是後寓靈覺。一日謂寺主曰。寺不移建。必圮於水。盍圖之。亡何。水大至寺果圮。僧亦有胥溺。衆乃服其236_560a神。及老入靈源立死關。以念佛爲課。日輪千念十周者十有餘年。庚戌臘。示微。辛亥正月三日。怡然入寂。壽八十五。臘六十六。是日也。弟子二十有七人。奉以涅槃。諸龍象奔奏號哭。雖下界衆蚩。亦莫不相告齎咨。師嘗論近世火浴舍利之出。有不慊于心者。及涅槃。雖祥光七夜不減。竟不以一舍利現靈。釋氏觀理。有固未始不爲無也。無亦未始不爲有也。有而謂之無可也。無而謂之有。亦無不可。眞有眞無。又誰能辨之。羣弟子無以寓其誠。豎塔靈源。禪雲僧亦如之。此不忘舊時薙髮也。嗚呼。師一言以蔽之。曰華嚴之236_560b忠臣也。若聖淵。又師之忠臣也。盡心所事。儒與釋道未嘗不同。余不銘。何以勸在後之千劫也。况師臨化飭弟子曰。愼勿碑。又曰。如不得已。非乞銘蔡相國。不可。余不知師。師能知余。義不可相負。乃作銘。銘曰。
佛有華嚴。正法眼藏。誰其抱持。雪坡心長。鬱攸何物。敢爾跳踉。移諸腹笥。登彼文梓。如來色笑。曰余嘉爾。雪坡功德。我聞如是。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영원사 부도군(靈源寺 浮屠群)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영원사 입구에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다. 가운데 육각의 옥개석이 있는 장중한 부도는 조선 후기 화엄학(華嚴學)의 고승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의 부도 설파당탑이다. 상언스님은『화엄경』 판목을 다시 새겨 영각사(靈覺寺)에 봉안하였고, 영원사에서 10여 년 동안 염불을 일과로 하여 하루에 1만편을 염송했다고 한다. 그의 부도는 고창 선운사에도 있다. 다른 4기는 벽허당[碧虛堂(1.1m)], 영암당[影巖堂(1.2m)], 중봉당[中峯堂(1.3m)], 청계당[淸溪堂(0.9m)]의 부도인데 중봉태여(中峯泰如 ?~1830) 이외는 법명은 미상이다.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1793년 정조 17년 계축 봄~겨울 함양군수 윤광석의 사재 헌금으로 중봉태여(中峯泰如 ?~1830)가 전년에 소실된 지리산 영원암 중건하고 진영각도 짓다. 1839년에 노광리 「영원암중수기」를 짓다. 중봉당의 부도는 영원사 입구에 있다.

정혜(定慧)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85-1741(숙종11-영조17)
회암(晦庵)
활동분야 고승
 
 
 
 
정혜(定慧)에 대하여
 
정혜(定慧)
1685(숙종 11)∼1741(영조17). 조선 후기의 고승. 성은 김씨(金氏). 호는 회암(晦庵). 창원출신.
9세에 어버이에게 출가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스스로 범어사(梵魚寺)의 자수(自守)에게 가서 중이 되었다.
그의 뛰어남을 안 자수는 충허(冲虛)에게 보냈으며, 충허는 정혜를 데리고 가야산의 원민(圓旻)에게 가서 참학(參學)시켰다.
원민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장경(藏經)을 배웠다.
이때 향산(香山)의 추붕(秋鵬)이 호남에서 강석을 열자, 원민의 허락을 얻어 이에 참석하였다.
추붕의 문하에서 돌아온 뒤 명성을 떨치자 원민이 의발(衣鉢)을 전해주고, 1711년(숙종 37) 율사(栗寺)에서 강석을 열게 하였다.
그러나 일암(一庵)·환성(喚醒) 등의 고승을 두루 방문하여 수업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좌선, 정진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청으로 석왕사(釋王寺)·명봉사(鳴鳳寺)·청암사(靑巖寺)·
벽송사(碧松寺) 등의 사찰에서 강석을 열었다.
만년에 청암사에 주석하다가 1741년(영조 17)5월 20일에 입적하였다. 날마다 경을 외우되 한 번 읽어 500행을 외웠고, 특히 화엄에 밝아 이를 수십편 강의하였으며, 역(易)에도 밝았다.
경전을 연구하여 하나하나 철저히 소화하였고, 또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계합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화엄경소은과 華嚴經疏隱科》·《선원집도서착병 禪源集都序著柄》·《별행록사기화족 別行錄私記畵足》·《제경론소구절 諸經論疏句絶》 등이 있다. 불령산(佛靈山) 쌍계사(雙溪寺)에 그의 비가 있다.
 
 
 
참고문헌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朝鮮寺刹史料. 〈金相鉉〉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霜月大師碑銘 
 


余屛居明德山中。.....日。方丈僧春坡堂義一。袖憕寤所撰霜月大師狀。來請銘。余儒者徒也。師之狀奚爲於余之門。春坡留半載乞食。不獲不歸。試閱其狀。犂然有契余意者。嗚呼。註說之支離。儒與釋奚異。其狀曰。師名璽篈。俗姓孫。順天人也。母金。於浴佛夕。夢梵僧授一顆珠。已而有娠生師。肅宗丁卯也。十一。投曹溪之仙巖寺極俊長老。十六。受具於文信大師。十八。參雪巖和尙。道旣通。衣鉢歸焉。遍參碧虛南嶽喚惺蓮華。皆獲其心印。二十七。歸故山。開演三乘宗旨。四方緇流多歸之。

 

지안(志安)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64-1729(현종5-영조5)
삼낙(三諾)
환성(喚醒)
활동분야 대선사
 
 
 
 
지안(志安)에 대하여
 
지안(志安)
1664(현종 5)∼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 성은 정씨(鄭氏). 호는
환성(喚醒), 자는 삼낙(三諾). 춘천출신.
15세 때 미지산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였고, 정원(淨源)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7세 때 설제(雪霽)를 찾아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뒤, 침식을 잊고 경전(經典)을 연구하였다.
1690년(숙종 16) 모운(慕雲)이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하였는데, 모운이 수백명의 학인(學人)을 그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으므로 뒤를 이어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강연은 뜻이 깊고 묘하고 특이한 것들이 많았으므로 의심을 품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육조대사(六祖大師) 이후의 여러 주석서(註釋書)을 실은 빈 배가 전라도 낙안의 징광사(澄光寺) 부근에 왔는데, 그 주석서들의 내용이 지안이 말한 것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탄복하였다.
그뒤 전국의 명산을 순력하고 지리산에 머물렀는데, 어떤 도인이 다른 곳으로 갈 것을 명하여 급히 옮기자, 며칠 뒤 그 절이 불타버렸다.
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머물다가 큰비가 쏟아지는 날 절을 떠났는데, 도중에 한 부잣집에서 자고 갈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두막집에서 잤다. 그날 밤 정양사와 그 부잣집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1725년(영조 1)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열었을 때 학인 1, 400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1729년 법회 관계의 일로 무고를 받아 호남의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으나, 반대의견 때문에 다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도착한 지 7일 만에 병을 얻어 입적하였다.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나이 65세, 법랍 51세였다.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비가 있다. 임제종(臨濟宗)의 선지(禪旨)를 철저히 주창한 선사였으며, 조선 후기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닦는 전통을 남긴 환성파(喚醒派)의 시조이자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의 1인으로도 숭봉되었다.
법맥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
지안―체정(體淨)―상언(尙彦) 등으로 연결된다.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 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 喚醒詩集》 1권이 현존한다.
 
 
 
참고문헌
 
東師列傳,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金渭錫〉

 

                  상무주암   上無住庵

 

                                   금명보정(錦溟寶鼎, 1881-1930)

 

登庵橫擧一衡推   암자에 올라 눈을 부릅뜨고 보니

萬里群山似局棋   만리에 여러 산은 바둑판돌 같네

庭上玉波天不隱   마당 우물은 하늘이 숨기지 않고

籬邊珠塔鬼難知   담 옆의 탑은 귀신도 알기 어렵네

月生水國龍開眼   물나라에서 달 뜨니 용이 눈 뜨고

霧溢雲江野闢池   구름 강에서 안개 이니 들에 연못

入定高僧無住着   선정에 든 고승은 집착이 없으니

牧牛禪翁覓牛時   목우자 스님이 소를 찾을 때라네

 

                  원정동   圓正洞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

 

三日藍輿上   사흘 가마 위의

吾遊正及時   나의 유람은 때에 맞지

巖花行處礙   바위 꽃은 다니는데 방해되고

篁笋踏來披   대숲은 밟으며 길내네

碧嶺登登嘯   푸른 고개는 걸음걸음 휘파람

淸溪曲曲詩   맑은 시내는 굽이굽이 시

武陵何所在   무릉도원이 어디메뇨

山鳥爾應知   산새야 너는 알리라

 

역주: 어우 유몽인의 지리산 천왕봉 등정 하산 코스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百丈寺-嬴代村-黑潭-黃溪瀑-歡喜嶺-內院-頂龍菴-月落洞-黃昏洞-葛越嶺-靈源菴-獅子項-長亭洞-實德里-君子寺-義吞村-圓正洞-龍游潭-馬跡庵-頭流菴-飛瀑-甕巖-淸夷堂-永郞臺-少年臺-天王峯-聖母祠-香積菴-獅子峯-靈神菴-毗盧峰-義神寺-紅流洞-神興寺-洗耳巖-雙溪寺-臥龍亭-肅星嶺-南原府 <於于集後集卷之六,雜識,遊頭流山錄>

 

                  용유담에 시를 지어 던지다 題一絶投龍游潭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

 

聖母祠前專石洞   성모사 앞에서 구멍돌 차지하고

天王峰下役波臣   천왕봉 아래에서 물고기 부리네

人間豈少朱泙漫   인간에 어찌 주평만이 없으랴

宜沕重淵戢玉鱗   깊은 못에 숨어 모습을 감추거라

 

역주: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 편에, 주평만(朱泙漫)이 용 잡는 기술을 지리익(支離益)에게 배우는데 천금의 재산을 다 없애고 3년 만에 기술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 묘법을 써볼 곳이 없었다.” 하였다.

 

휴천면 문정리 도정정사

고려처사 성산이공의 묘 비문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 1862~1935)

 

고려왕조는 중기 이후 권력자가 발호하고 외적이 침입하여 종묘 사직이 위태하고 백성이 어육이 되었다. 이때에 기미를 알고 은둔하여 물들지 않은 사람으론 녹사 한유한①과 요산공 이억년②이 유일할 것이다. 녹사는 고려 신종 시기에 최충헌(1149~1219)이 집권하고 몽고가 국토를 잠식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서쪽으로 은둔하였다. 뒤에 나라의 초빙을 받게 되자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그 시에,

“한 편의 조서가 산골짝에 날아 들어오니

비로소 이름이 인간 세계에 알려진 것을 알게 되었네”

고 하였다. 요산공은 충렬왕(재위 1274∼1308) 때에 원나라가 송나라(960∼1279)를 멸하고 나라의 기강이 해이된 것을 보고 새로 문과 급제자의 신분으로 떠나 지리산 북쪽에 숨어 은거하는 집을 한 채 짓고 도정정사라고 이름붙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10년의 속세 일은 꿈 밖의 일인데

청산 어느 곳에서 홀로 대문을 닫아걸고 있는가?”

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로도 공의 고상한 뜻이 김이상(1232~1303), 허겸(김이상의 제자, 다 송말원초의 은사임)③과 상통함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들은 드러나고 요산공은 묻힌 것이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더군다나 한 녹사는 남명의 평가를 얻어 산봉우리에 옥을 얹어놓고 수면에 달빛이 생긴 듯 백세에 빛나지만④ 요산공은 일두(정여창)선생과 탁영(김일손)선생의 평가를 얻지 못하고 그 <두류록>에 누락되었고 또 자손이 영락하여 우리 대동보에도 빠졌으니 거듭 비탄할 만하다.

공은 곧 우리 선조 농서공(이장경)의 제4자이고 매운당 문열공 이조년(1269~1343)⑤의 넷째 형이다. 묘소는 함양군 엄천(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 임좌병향의 언덕에 있다.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마을을 가리켜 억년동⑥이라고 한다. 사림이 안산서원⑦(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성주이씨 22현을 합사)에 배향하였다.

부인은  경주 이씨로 이용간의 딸이다. 쌍분으로 장례지냈다. 아들 태성은 밀직사사이고 태문은 낭중이다. 사위는 광평군 이능⑧(이호성의 5세조)이다. 손자는 일방으로 장남 소생이고 함방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치 않는다.

후손 이교연 등이 비석을 다듬어 언덕에 세우고자 하여 내게 기록을 청하였다. 우선 그 가문 전승의 기록을 토대로 그 글을 부연하여 이렇게 적는다.

을축년(1925) 3월 방손 이도복⑨(1862~1935) 삼가 지음

후학 청송 심상복⑩(1876~1951) 삼가 씀

후학 언양 김윤수 삼가 옮김

시조시인 김용규 탁본

 

李億年墓碑文  

 

高麗處士星山李公之墓

配慶州李氏祔左

勝國自中葉以降 權臣跋扈 外寇陸梁 宗社綴旒 生靈魚肉 當是時 能見幾而作 隱遯不汚 其惟韓錄事惟漢 李樂山諱億年乎 錄事當神宗時 見崔忠獻用事 蒙古蠶食 棄官隱遯于方丈之西 後蒙旌招 而以詩示志曰 一片絲綸飛入洞 始知名字落人間 樂山公則 當忠烈王時 見胡元簒宋 王綱解紐 以新榜文科 去隱于方丈之北 築一巖栖之室 曰道正精舍 嘗有詩云 十載紅塵夢外事 靑山何處獨掩扉 祗此一事 可想公志尙 與金仁山許白雲同調而其顯晦之相遜 如彼者何哉 且錄事得南冥而峯頭冠玉 水面生月 有光於百世 若吾樂山公 不得於一濯纓 而見漏其頭流錄 又因子姓之零替 漏我大同譜 重可悲也 公卽我先祖西公之第四子 而梅雲堂文烈公諱兆年之叔兄 墓在咸陽郡嚴川負壬之阡 時人至今指點其里曰億年洞 士林從享安山書院 夫人慶州李氏龍幹女 葬用魯人禮 子男台成密直司事 台文郎中 女壻廣平君稜 孫男日芳長房出 涵芳次房出 曾玄不盡錄 後孫敎然等 將伐石以竪 請余以記之 姑據其家傳所錄 抽演其說 如此云爾

蒙赤奮若淸明節傍裔孫道復謹撰
後學靑松沈相福謹書

 

① 한유한-<고려사 열전>

한유한은 역사에 그 계보 기록이 없다. 대대로 개성에 살았고,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최충헌이 독재하고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리가 날 것이라고 하고는 처자식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굳은 절개로 깨끗하게 살며 외부인과 교유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 풍취를 고상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불러 서대비원 녹사로 삼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깊은 골짝으로 이거한 채 종신토록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거란 병의 침략이 있었고 몽고 병이 연이어 침입하였다.

韓惟漢. 

韓惟漢史失其系世居京都不樂仕進見崔忠獻擅政賣官曰難將至矣. 挈妻子入智異山淸修苦節不與外人交世高其風致. 徵爲西大悲院錄事終不就乃移居深谷終身不返未幾果有契丹之難蒙古兵繼至.

 

② 이억년(李億年) :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 1285년(충렬왕11년)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치사(致仕), 위성(渭城: 함양) 엄천리嚴川里)로 들어가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공맹의 도를 강론하였다. 성주의 안산서원, 금릉의 상친사에 제향.

《성주이씨세보》에 “또 다른 이름은 영(永)이요 호는 요산재이다. 을유년(1285, 충렬왕11)에 문과에 올라 개성유수를 역임하고 무술년(1298, 충렬왕24)에 위성으로 이거하여 도정정사를 짓고 십재홍진몽외사하니 청산하처독엄비란 시를 지었다. 묘는 함양 남쪽 휴천면 문정촌 장항촌내 임좌다. 영정은 안산사에 봉안하다. 부인은 경주이씨 용간의 딸이요 묘는 쌍분이다.” 하였으니 묘비문과 족보 행적이 상이하다. 묘비문은 문과급제하자마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족보는 개성유수를 역임한 뒤로 서술하고 있다. “10년의 홍진을” 하는 시구를 보면 10여 년 벼슬살이를 한 듯하다. 다만 개성유수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 처음 설치되었다.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시대까지는 이억년의 문과급제 사실만 알려지고 개성유수 벼슬 사적이 밝혀지지 않았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이 1월부터 8월까지 왕위에 올라 재임중 여러 사람을 중경유수나 개성부윤을 시켰는데 이억년의 이름은 없지만 그전에라도 역임했을 수 있다. 이억년은 충선왕파로서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복귀하자 산간오지 함양 지리산 도정동으로 피신하여 은거하고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이 다시 복위했을 때는 이미 별세하여 복권되지 못한 듯하다.

<연려실기술>(1776, 영조 52년)의 성주 서원조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1602,선조35)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ㆍ이인복(李仁復)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ㆍ이숭인(李崇仁)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 ㆍ정곤수(鄭崑壽)선조조의 명신.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1635,인조13)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 ㆍ이백년(李百年)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ㆍ이천년(李千年)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ㆍ이만년(李萬年)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 ㆍ이억년(李億年)문과에 합격하였다. ㆍ이조년(李兆年)위에 보라. ㆍ이인기(李麟起)평양 부윤을 지냈다. ㆍ이승경(李承慶)평장사를 지냈다. ㆍ이포(李褒)문하시중을 지냈다. ㆍ이원구(李元具)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 ㆍ이인복(李仁復)위에 보라. ㆍ이인임(李仁任)출향(黜享)되었다. ㆍ이인민(李仁敏)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 ㆍ이숭인(李崇仁)앞에 있다. ㆍ이직(李稷)태조조의 정승 ㆍ이제(李濟)태조조의 명신 ㆍ이사후(李師厚)한성윤(漢城尹)이다. ㆍ이육(李稢)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 ㆍ이광적(李光廸)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우애 이야기- 투금탄(投金灘)

서울시 강서구 가양2동 앞 한강여울(지금은 )을 투금탄이라 한다. 『성주이씨가승』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고려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젊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이 나눠가졌다. 형제는 공암나루를 건너고자 나룻배를 탔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한강 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이 깜짝 놀라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생은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 형제의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던들 나 혼자서 금덩이 두개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악한 마음이 들어 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려고 해서 액물인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했다. 이에 형님도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③ 김인산 [金仁山 1232~1303] 

중국 송말(宋末) ·원초(元初)의 유학자.

본명  김이상(金履祥)

별칭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인산선생

국적  중국 송(宋)ㆍ원(元)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주요저서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이름 이상(履祥).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출생. 인산선생(仁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군서(群書)에 통달하였다. 장년이 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왕노재(王魯齋) ·하북산(何北山)에게 사사하고, 주자(朱子) ·황면재(黃勉齋)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송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책(奇策)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으며, 송나라가 멸망하자 진화산[金華山]에 숨어 살았다. 문집에 《인산집(仁山集)》, 주요저서에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등이 있다.


허백운(許白雲) 허겸(許謙)

절강성 금화 사람이다. 자는 익지요 어려서 고아 되고 학문에 힘썼다. 인산 김이상에게 수업하여 그 비오를 다 전수받았다. 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마을 밖을 나가지 않은 지 40여 년이었다. 공경대부들이 여러 번 천거했지만 초치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강학하여 정성을 다하니 종유한 제자가 1천여 인이었다. 사방의 선비들이 문하에 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사대부들이 그 고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그 집에 들러 안부를 물었고 간혹 예법과 정무를 묻기도 하였는데 듣고서는 모두 만족해하였다. 늦게 백운산인이라 자호하니 세상에서 백운선생이라고 불렀다. 졸하자 문의공이라고 하였다. 저서에 《독서총설》, 《시집전명물초》, 《백운집》 등이 있다. 성리학자로 원초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금원사대가로 불리는 명의 단계 주진형의 스승이다.


④ 산봉우리에 옥을 얹고: 남명(조식)선생의 <유두류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한다면, 십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격이다.

而比韓鄭趙三君子於高山大川, 更於十層峯頭冠一玉也, 千頃水面生一月也.


⑤ 이조년 [李兆年 1269~1343]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별칭  자 원로(元老), 시호 문열(文烈), 성산군(星山君)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 안남서기(安南書記)가 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書郞)을 역임하였다. 1306년 비서승(書丞) 때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하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이에 연루되어 귀양갔다. 그 후 풀려나와 13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고,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왕위찬탈 음모를 원나라에 상소하였다.

12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 수차 원나라에 다녀왔다. 12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 사직,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이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l수가 전한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⑥ 억년동: 억년동은 미상이다.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백련동은 이억년의 백형인 이백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문정리는 일두(문헌공 정여창)선생이 살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문헌동과 이억년의 도정정사가 있던 도정동을 합하여 명칭한 것이다.


⑦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星州郡 碧珍面 紫山里 安山村)에 역대(歷代)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에서 도덕(道德), 경술(經術), 문장(文章), 관직(官職)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貢獻度)가 높은 현조(顯祖) 영정(影幀) 22位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이다.

서원(書院)의 제도는 당나라 현종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등을 설치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는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학습기관 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조 중기부터 보급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신라 불교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계승하였던 까닭에 지방마다 국법으로 건립한 사찰이 있어서 국가에 공로가 현저한 분은 사후(死後)에 반드시 출생지 소속 사찰에 사당(祠堂)을 따로 설립하도록 하고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은 초상화(肖像畵)를 만들어 후세에까지 그 위업(偉業)을 전하도록 하였으니 서원(書院)과 비슷한 제도라 하겠다. 이 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말에 현창(顯彰)한 분이 많아서

중시조 농서군공 이장경(中始祖 西郡公 李長庚),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경원공 이포(敬元公 李褒),

초은공 이인복(憔隱公 李仁復),

도은공 이숭인(陶隱公 李崇仁),

형재공 이직(亨齋公 李稷)

여섯 분의 영정(影幀)을 국가의 숭봉(崇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옆 선석사(禪石寺)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嫡庶) 18王子의 태실을 만들게 됨으로서 산소는 오현(梧峴)으로 이장하고 사당은 이곳 안산사(安山寺)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그후 선조(宣祖) 14년(1581) 후손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영당(影堂)을 중수(重修)하고 제기(祭器) 등을 새로 비치하였으며, 11년후인 임진왜란때 왜적(倭敵)이 침공하여 영정(影幀) 일부를 훔쳐 갔으나 승(僧) 경종(敬宗)이 나머지 영정(影幀)을 잘 수습하여 땅속에 묻어 보관하므로서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조(宣祖) 39년(1606) 외손(外孫) 이덕온(李德溫)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사림(士林)과 더불어 영당(影堂)을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으며,광해(光海) 9년 후손 이욱(李稶)이 경향각지의 친족들과 더불어 네 번째로 중수하고 현종(顯宗) 6년(1665) 6칸 신주(神廚)와 4칸 재실(齋室)을 완성 하였다.

인조(仁祖) 10年(1632)경상감사(慶尙監司)의 허가를 얻어 재실(齋室) 동편에 새터를 잡아 유림(儒林)에서 이문환(李文煥), 곽천우(郭天佑) 등이 도감이 되어 영당(影堂)을 새로 짓고 열세분을 추배(追配)하였으니,

밀직사사이백년(密直司事 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參知政事 李千年),

문하시중 이만년(門下侍中 李萬年),

개성유수 이억년(開城留守 李億年),

평양윤 이인기(平壤尹 李麟起),

요양성참지정사 이승경(遼壤省參知政事 李承慶),

대호군 이원구(大護軍 李元具),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

대제학 이인민(大提學 李仁敏),

경무공 이제(敬武公 李濟),

한성판윤 이사후(漢城判尹 李師厚)등이고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

정헌공 이광적(靖憲公 李光迪)이 추배된 것은 그 뒤의일이다.

숙종(肅宗) 6년(1680)에 다시 문정공 이지활(文靖公 李智活),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

사헌부 전중어사 이조(司憲府 殿中御史 李晁) 등 세분을 추배(追配)하고 춘추(春秋)로 인근 유림(儒林)에서 모여 제사 지냈으나 고종(高宗) 8년(1871)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에 따라 안산영당(安山影堂)으로 이름을 바꾸는 수난(受難)을 겪었다. 그후 병진년(1916) 다시 중수하고 영정(影幀)의 감실(龕室)을 구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제향(祭享)한다.

서원(書院) 앞에는 농서군공(농西郡公)의 신도비(神道碑)는 철종 6년(1855) 경향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鍾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좨주 매산 홍직필(祭酒 梅山 洪直弼)이 비명(碑銘)을 짓고 판서 응와 이원조(判書 凝窩 李源祚)가 글씨를 썼다.

영정(影幀) 10종 13폭은 경상북도 유형(有形) 문화재 제245호로, 영당(影堂)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地方) 문화재(文化財) 제217호로 각각 지정 되었다. 진영(眞影)은 별도 봉안(奉安)하고 있고 현재 봉안된 영정은 100여 년 전에 개모(改摹)한 것이다.


⑧ 이능 5세손- 이호성(李好誠)

  이호성은 조선 초기 무신으로 본관은 성주이고 호는 동산이며, 삼중대광 광평군 이능의 5세손으로 경남 함안에서 1397(태조6)에 태어나  금산에서 1467년(세조13)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정무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고 달리는 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으며 병법에 능통하였다.

  세종 9년(1427년) 무과에 급제, 사복시직장이 되고 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459년 첨지중추원사 겸 경상좌도도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을 요청하였으며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상우도처치사에 임명하였다.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49년 거제 현감에 임명되어 읍을 옮기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했다. 그 후 보성, 경산 고을을 맡아 청백명관으로 알려져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공조참의 거쳐 국정이 불안해지자 노모의 봉양을 애걸하여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가 단종 1년(1453년) 경상우도처지사가 되고 144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세조 3년(1457)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거치면서 왜인의 변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연변제읍의 제색군인을 동서양계의 예와 같이 각기 본 읍에 소속, 수비하게 하고 영진군을 내지 군사로 소속시켜 불의의 일에 임하도록 하며, 아울러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방책과 야인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큰 성을 쌓아 후환을 미리 제거하자고 건의하였다.

  일찍이 최윤덕의 북정 때 편비로 이름을 떨쳐 비장군 이라 불렀으며, 20년 동안이나 북방을 수비하여 산천의 형세를 환히 알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를 함에 실수가 없었다.


⑨ 이도복(李道復) (1862~1935, 철종13~)

성주인 경무공파 19세 수(壽)77세

14세 강촌(江村) 여공(如珙)의 5세손이다.

자(字) 양래(陽來), 호(號) 후산(厚山), 거(居) 단성(丹城) 신안(新安)

철종(哲宗) 13년 임술(壬戌) 1862년 5월 28일생이며 1938년 무인(戊寅) 윤(閏) 7월 8일 졸(卒)했다.

졸(卒) 36후 계사(癸巳)에 사림(士林)에서 진안군 영곡사(靈谷祠) 배향(配享) 하였다.

동곡(桐谷) 조(晁)의 후손, 동범(東範)의 자(子)로 천자(天資)가 강의(剛毅)하고 기우(器宇)가 준정(峻整)하여 박만성(朴晩醒), 송연재(宋淵齋)에게 의기(李氣)와 학문을 전수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곽종석(郭鍾錫)과 조약무효와 오적을 참형할 것을 상소(上疏)하였으며 최면암(崔勉庵)에게 ?수신사명(修身俟命)?이란 글을 받아 후일을 기약했다. 스승 문집간행에 성실히 하고 한유(韓愉)와 깊은 학문을 토론하다 경술국치이후 전라도 마이산(馬耳山)으로 입산, 그곳 호남선비와 상교하며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는데 서어절요(書語節要), 중용도(中庸圖), 이학통변(理學統辨), 기정동감(紀政宗鑑), 심현기년(三賢紀年), 치종록(致宗錄), 존화록(尊華錄), 동감절요(東鑑節要) 등과 문집 22권 11책이 전한다.


⑩ 심상복(沈相福: 1876~1951)

목판본 古書 탄생과정 '한눈에' 2004-07-14

한말 이후 서부 경남 유학자 집안 목활자 인쇄문화의 전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목활자 일괄 유물이 박물관에 기증돼 일반에 공개 됐다.

특히 전시되는 6만5천여 개의 목활자는 유일하게 제작자가 알려진 개인 제작 활자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고경희)은 지난 13일부터 8월31일까지 '목활자로 보는 옛 인쇄문화-심재온 기증유물전'을 열고 있다.

특별전 에 나온 유물들은 지난해 3월 심재온(79·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 계리)옹이 기증한 목활자와 인쇄용 소도구, 고서적들. 여기에는 활자새김에서부터 책으로 간행되기까지 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목활자 6만5천186개, 활자를 분류해 보관하는 상자 21판, 활자 식자판 4개, 새기는 칼 등 활자 관련도구 들이 그 것. 또 활자 집게용 젓가락, 식자용 송곳 등 판짜기 도구, 책 표지 장식 그림인 능화판(菱花板)과 밀돌 등 제본용 도구, 활자를 처음 새기기 위해 쓴 활자초인자본(活字初印字本),교정지 등도 포함돼 있다.

또 1880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215종 551책의 서적도 기증목록에 올라와 있다.

기증자 심재온의 조부인 심상복(1876~1951)의 문집 '치당집(恥堂集)'을 비롯, 한말 이후 일제시대 이 지역 유학자인 김복한의 '지산집(志山集)', 이택환의 '회산집(晦山集)'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서적들의 60% 가량은 기증 목활자로 찍은 것이어서 결국 목활자 새기기에서 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유물이 망라된 셈이다.

한편 지방의 목활자들은 만든 시기와 글씨를 쓴 사람, 활자로 간행 한 책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증된 활자의 경우 심상복이 자본(字本)을 쓰고, 각수 김명곤이 하루에 1천개 가량의 글자를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제작자가 분명하다.

또 심상복은 단순한 인쇄업자가 아니라 최익현, 이도복의 가르침을 받은 노론계열의 유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서적 들을 통해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부 경남지역 유학자들의 교육활동과 학문세계도 유추할 수 있다.

기증 유물의 학술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29일 오후 2시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목활자와 경남 지역의 목활자 인쇄문화', 이상필 경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청송심씨 가장(家藏) 고서적의 성격'을 주제로 특강을 열었다.  (2005.12.22 함양문학 14호)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

 엄천사(嚴川寺)와 헌강대왕 99.6.4.

              

                                                                        무가암(無可菴) 탄부(坦夫)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것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신라 헌강왕9년,883) 봄에 헌강대왕이 화암사(華岩寺:화엄사)에 사신을 보내어 결언선사를 초빙하였다. 선사가 이르자 왕이 예로써 대우하고 분부하였다.

"궁궐에 선사를 초청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지요.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감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다 선왕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때때로 그 절에 불공을 드려 선왕의 명복을 빌고 국운의 연장을 기원했으니 이것은 대대로 계승하는 대업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잇지 못한다면 선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선사를 번거롭게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선사를 통해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듣건대 해동의 명산이 많지만 지리산이 가장 높고 깊다고 하니 선사가 그곳에 가서 터를 잡고 절을 지어 영원히 우리 선고왕(先考王)을 위해 명복을 비는 원찰로 만들어준다면 그 자비와 보시가 클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사가 명을 받들어 지리산에 와서 산을 따라 맥을 점치고 시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다 마침내 이 땅을 얻었다. 보고를 받은 왕은 백성을 동원하고 조세를 돌려 쓰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같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절이 지어지자 왕은 엄천사라 하사하였다. 그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낙성식의 법회를 열 때 왕도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다. 드디어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로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라고 칭하였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왕비 김씨가 곡식 천 섬을 희사하여 죽은 아우를 위해 명복을 빌고 최치원(885년 귀국)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짓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 절이 퇴락했으나 보수하지 못하였다.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이 절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은 다 불에 소실되었다. 강희(康熙) 25년 정묘 우리 임금님 즉위 14년(숙종13,1687)에 안양사(安養寺:지금의 문정리 법화사) 승려 인욱(印旭)과 혜문(惠文) 등이 안양사가 험고한 데 있어 왕래가 어렵다며 평탄한 엄천사 터로 절을 옮기자고 대중에게 동의를 얻고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여 승낙을 받아 수백 명의 승려들이 재물을 모으고 공역을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 땅은  향교의 수세지(收稅地)로 편입되어 있어 절을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 세월이 천연되었다.

 경오년(숙종16,1690) 봄에 동의를 얻어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 벽암 각성(碧巖 覺性:1575-1660)의 손자인 침허(枕虛)의 아들 죽계당(竹溪堂) 승현(僧絢) 대사가 지휘하여 중건하였다. 옛 주초를 인하여 18동(棟) 100간의 건물을 지었다. 임신년(1692) 봄에 왕명이 내려 4결(結)이 면세전으로 되었다.

 승민(勝敏)이 사적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강희 32년 계유(1693,숙종19) 2월 5일에 무가암(無可菴)의 탄부(坦夫)가 사적기를 지었다. 이후 48년 기축(1709,숙종35) 6월 2일에 시와 서문을 지었다. (시서 생략) (含山抄譯)

 *엄천사는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 마을에 있던 큰절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 신라 시대에 하동, 구례, 함양 등지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를 심어 전래되는 것을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함양군수(1471-1476)로 부임한 뒤 새로 차밭(茶園)을 조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사적비가 마을 앞에 서 있다.  

*결언선사(決言禪師) : 865년(신라 경문왕 5년): 화엄대덕(華嚴大德) 결언(決言)이 해인사에서 5일간 경을 강의. 大嵩福寺碑銘: 遽命有司。虔修法會。華嚴大德釋決言承旨於當寺。講經五日。所以申孝思而薦冥福也。

해인사는 서기 802년(신라 애장왕 3년) 10월16일 의상 스님의 법손인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스님이 지은 화엄 도량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던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의 제작연대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83년으로 밝혀져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불상으로 판명됐다.

고운 최치원의 친형인 현준대덕(賢俊大德)은 정강왕 1년(886년)에 화엄경사(華嚴經社)를 지리산 화엄사에 결성하고 경전의 글을 베껴 썼으며, 현준과 함께 결언대덕(決言大德)도 화엄의 종장(宗匠)들이라 할 연기(緣起), 지엄(智儼), 의상(義湘), 원측(圓測)을 위해 남악(南岳)인 화엄사와 북악(北岳)인 부석사에서 제를 올리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삼았다.

해인사 주지를 지내고 화엄사에 있던 결언선사가 엄천사를 창건하였으니 엄천사는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 된 것이다.

결언선사는 883년(헌강왕9)에 엄천사 창건이라 했는데 낭원대사 개청은 이미 859년(헌안왕 3)에 엄천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창건 연대가 오히려 올라가야 할 것이다. 연대 기술에 착오가 있은 것이다.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 (開淸, 835~930): 대사의 호는 개청(開淸)이었고 속성은 김씨이며 진한(辰韓)의 계림인으로 흥덕왕 10년(835) 4월에 태어났는데, 그 모습이 남보다 뛰어나 어려서부터 입도(入道)하기를 간구하여 부친의 허락을 받고 화엄사로 출가하여 정행법사를 스승으로 섬기며 화엄학을 익혔다.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오대산의 통요대사(通堯大師, 범일 [梵日, 810~889])를 뵙고 수행을 했다. 경문왕도 그의 덕행이 높음을 듣고 왕도(王道)가 위급할 때 돕도록 국사의 예(禮)로 대우했으며, 보현산사에서 입적하니 속년(俗年) 96세, 승납 72세였다. 후에 낭원대사라 시호(諡號)하고 탑명(塔名)은 오진(悟眞)이라 했다.

*정행법사(正行法師) : 화엄사 사적에 의하면 경문왕 10년(870)에 잡화(雜花:화엄)의 묘지(妙旨)를 전하고 낭원(郞圓)이 청강(聽講)하였다고 하였다.

*범일(梵日 810~889) : 성은 김(金). 시호 통효(通曉).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가 제안(濟安)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 844년(문성왕 6년) 탄압으로 승려를 도태하고 절을 파괴하는 법난(法難)을 만나 상산(商山)에 피신, 선정(禪定)하다가 847년(문성왕 9) 귀국,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굴산사(崛山寺)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경문(景文)·헌강(憲康)·정강(定康)의 3왕으로부터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엄천사는 나말여초의 관단(官壇)이 설치된 계단사원(戒壇寺院)으로서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공증 수계 장소인 계단사원에서 구족계를 받아야 했는데 남방의 계단사원은 강주(서부경남지방)에선 엄천사가 유일하였다. 계단사원은 신라의 통일후에 冥州 福泉寺, 康州 嚴川寺, 全州 華嚴寺, 全州 金山寺, 漢州 莊義寺, 白城郡 長谷寺, 熊州 普願寺 등이 그 기능을 하면서 승단의 형성에 계율을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선종에서 출발한 승려들도 수계함으로서 신라에서 공적인 역할을 한 사원이었다. 특히 福泉寺, 嚴川寺, 華嚴寺는 官壇이라 명시되어 나머지 수계 기능을 한 사원도 관단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 사원은 대체로 9州에 망라되어 성립되었다. 주: 韓基汶, <新羅末 高麗初의 戒壇 寺院과 그 機能>, <<歷史敎育論集>>12, 1988.

*성선(性宣) 대사 :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엄천사 중수, 강법사가 되다.
고려 인종 시대 진억(津億)이 지리산 오대사(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절터에 수정사(水精社)란 절을 지었다. 송(宋)의 선화(宣和) 5년(1123, 고려 인종 1) 계묘(癸卯)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1129, 고려 인종 7) 기유(癸酉) 10월에 준공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3일간 베풀었다. 엄천사(嚴川寺)의 수좌(首座)인 성선(性宣)을 청하여 경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동남해안찰부사 기거사인 지제고(東南海按察副使起居舍人知制誥)인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고, 인하여 은 2백냥을 내리시어 이를 칭찬하였다. <지리산수정사기>

오대사는 조선 시대에도 절이 건재하였으니 남명 조식 선생이 오대사를 읊은 시도 있다. 지금은 국선도에 팔려 백궁선원이란 수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법우화상(法祐和尙)

 

무당이 굿을 할 때 한 손에 금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 채색 부채를 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너울너울 춤추며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또한 법우화상을 부른다. 이것은 대개 유래가 있다.

지리산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이 있었는데 매우 도가 높았다. 어느날 한가로이 있을 때 갑자기 보니 산골짝의 냇물이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불어났다. 그 근원을 찾다가 천왕봉 꼭대기에 이르러 키크고 힘센 한 여인을 보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서 <성모천왕은 곧 지리산신이다. 고려 때 박전지(朴全之)가 지은 용암사(龍巖寺) 중창기에 보인다.> 인간계에 귀양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마침 물로 도술을 부려 스스로 중매한 것이다." 고 하였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았다. 딸 8명을 낳아 자손이 번성하였고, 무술(巫術)을 가르쳤다. <지금 산 아래에 백무촌(百巫村)이 있다고 한다.> 금방울을 흔들고 채색 부채로 춤추며 아미타불을 부르고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동네방네를 다니며 무업(巫業)을 일삼았다. 그러므로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 번 지리산 꼭대기에 이르러 성모천왕에게 기도하여 접신(接神)한다고 한다.《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제15장》이능화(李能和 1869~1944) 지음.

*백무촌은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백무동으로 현재는 백무동(白霧洞 또는 百武洞)이라 표기한다. 고전 판소리 전집의 변강쇠가에 보이는 변강쇠가 나무한 백모촌(百母村)이 바로 이곳이다. 변강쇠가는 함양을 배경으로 하는 고전판소리문학이다.

*마적도사에 관한 첫번째 전설

지금의 경남 함양군 휴천면 용유당소 근처에 마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마적도사라는 법우화상이 살았다. 하루는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엄천강에 구름 한 점 없는 청천 맑은 날인데도 붉은 황톳물이 홍수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강을 따라 올라가 보니 지리산 천왕봉의 천태산 마고할멈이 앉아 오줌을 누더란다. 화상은 이 여자가 바로 천생배필임을 알고 부부의 인연을 맺고 결혼을 하였다. 부부는 딸을 아흔 아흡이나 낳았는데 모두가 무당이 되었다. 즉 마고할멈인 어머니까지 합쳐 백명의 무당이 되어 백무동이 생겨났고 그들이 조선 팔도에 흩어져 팔도 무당의 씨가 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무열왕때 실존 인물이라는 설이 있는 마적도사가 마적사를 창건하였다 하니, 마적사의 역사가 통일신라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함양문학 6호, 1997.12)

       

              엄천사 종각 상량문   嚴泉寺鐘閣上樑文

 

                                   추파홍유(秋波泓宥, 1718~1774)

 

勢扼嶺湖咸陽      형세상 영남과 호남을 누르는 함양은     

爲都護府之鎭勝  도호부의 요지이며 승지이다.

占智異嚴泉         지리산의 엄천을 차지하여

得大伽藍之名     큰 절의 이름을 얻었다.

孤雲子之所棲     고운선생이 깃들었던 곳이고

法祐師之攸創     법우스님이 창건한 곳이다.

千峯簇攅           천 개의 봉우리가 모였고

一水縈紆           한 줄기 물이 감돈다.

巖巒之雄高        바위가 웅장하고 높으니

則雁宕風斯下    안탕산도 이만 못하리.

道場之明淨        도량이 밝고 맑으니

而鷲靈美豈專     영축산만이 신령함과 아름다움을 독점하리오.

旣奠法殿之宏規  이미 법당의 큰 규모를 정했으니

爰諏鐘樓之繼搆  이어 종루를 지을 것을 묻는다.

筮陰陽於筠璞     오균과 곽박에게 길일을 점치고

勑杗桷於倕般     수와 공수반에게 재목을 부탁하였다.

輸岱山之奇材     태산의 좋은 목재를 실어오고

寫崑丘之美石     곤륜산의 고운 돌을 실어왔다.

事皆從而順矣     일이 다 따라서 순조로우니

不日成之            며칠 안 되어 이루었다.

衆亦樂而爲焉     무리들도 즐거이 하기를

如雲集也           구름이 모이듯 하였다.

一閣功訖           한 채 누각의 공사가 끝나니

六偉唱騰           육위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兒郞偉抛梁東     으라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자

鏜鏜鞳鞳曙暉中  댕그랑댕그랑 새벽 햇빛 속에   

人間猶作牽情夢  인간들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으니

一鼓惺惺喚主翁  일개 북으로 깨우쳐 주인공을 부르다

兒郞偉抛梁南     으라차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자

鞳鞳鏜鏜午餉甘  댕그랑댕그랑 점심이 맛있으니

莫使木魚鳴飯後  목어를 식사 뒤에 울리지 말게 하여

山中飢客盡來參  산속의 주린 손들 다 와 참석케 하라.

兒郞偉抛梁西     으라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자

鏜鏜鞳鞳日輪低  댕그랑댕그랑 해가 낮게 깔리니

日輪方向金天去  해는 바야흐로 서쪽 하늘로 향하나

䓗嶺雪山路不迷  총령과 설산의 길은 헤매지 않는다.

兒郞偉抛梁北     으라차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자

鞳鞳鏜鏜時夜寂  댕그랑댕그랑 때는 적막한 밤

吳質欲消黑業纏  오질이 악업을 소멸시키고자 하면

不眠應誦彌陀百  자지 못할 때 아미타주를 백 번 외어야 하리.

兒郞偉抛梁上     으라차 들보를 위쪽으로 던지자

鏜鏜鞳鞳飛淸響  댕그랑댕그랑 맑은 소리 날리어  

隨風散入白雲間  바람 따라 흩어져 흰구름 사이로 들어가니

諸佛翩然來髴髣  여러 부처님들 훌쩍 눈에 선하게 내림하시는 듯

兒郞偉抛梁下     으라차 들보를 아래쪽으로 던지자

鞳鞳鏜鏜長不啞  댕그랑댕그랑 길이 입다물지 말고

三十三天廿八星  삼십삼천 이십팔수

晨昏不失鳴蘭若  아침 저녁 때 잃지 말고 절에서 울려라.

伏願上樑之後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神祐一寺           신들은 한 절을 도우시어

聲聞十方           소리가 시방에 들리고

帀磬鑼而揚靈    경쇠와 징과 함께 신령함을 드날리어

千魔辟易          온갖 마귀들 피하게 하고

侑唄誦而娛佛    범패 소리를 도와 부처님을 즐겁게 하여

百祿多將          온갖 복을 많이 받게 하소서.

 

   <<秋波集>> 卷三

 

역주

1. 엄천사는 원문에서 샘 천자를 썼으나 내 천자가 옳다. 지금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 마을이 엄천사 터이며 절의 주춧돌이 산재해 있고 앞에는 엄천강이 흐른다.

2. 함양군은 영조 5년(1729)에 도호부로 승격하고 정조 12년(1788)에 다시 군으로 환원되었는데 이 글이 지어진 시기는 함양도호부 시절이었다.

3. 오균은 당나라 때의 도사이고 곽박은 진(晉)나라 때의 술사로 풍수지리학의 창시자이다. 둘 다 점을 잘 쳤다.

4. 수는 중국 황제 시대의, 공수반은 중국 노나라 시대의 유명한 기술자이다.

5. 상량문 가운데 아랑위로 시작되는 부분은 노래로서 동서 남북 상하 여섯 절구 시로 이루어졌다.

6. 총령은 파미르 고원이고 설산은 히말라야산맥인데 총령은 달마조사가 넘어와 중국에 선불교를 전했고 설산은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곳이므로 다 불교를 상징한다.

7. 오질은 오강(吳剛)이라고도 한다. 전한 시대 사람으로 신선을 배우다가 잘못을 저질러 달 속의 계수나무를 베는 벌을 받았다. 계수나무는 높이가 5백 척(1척은 30cm)이나 되는데 도끼로 찍으면 갈라졌다가 도로 붙어버렸다. 오질은 자지 못하고 부질없이 계속 찍어댔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의 바위와 유사하다.

8. 추파 홍유 스님은 숙종 44년에 태어나 영조 50년에 입적하였다.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산청 심적암에 주석하다가 입적하여 영정이 거기에 봉안되었다. 벽송사 스님인 경암 응윤 스님이 그 제자로서 그의 <<추파집>>을 정조 4년(1780)에 간행하였다. (함양문학 6호, 1997.12)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관영 차밭(官營茶園) 조성터(造成址) 기념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목민관으로서 군민이 나지도 않는 차를 공납하느라고 온갖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시고 엄천사 북쪽에 관영 차밭을 조성하여 고통을 덜어 주었으니 선생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다.

 

   1998년 11월

   함 양 군 수

 

후면

 

          차 밭(茶園)

                        점필재 김종직 시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대숲 밖 거친 동산 1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같은 명다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欲奉靈苗壽聖君

新羅遺種久無聞

如今得頭流下

且喜吾民寬一分

竹外荒園數畝坡

紫英鳥嘴幾時誇

但令民療心頭肉

不要籠加粟粒芽

後學 金侖秀 譯

後學 李昌九 書

함양문화원

한국차문화협회

가천문화재단

일선김씨대종회

 

               함허정에서   題池谷涵虛亭

 

                                   송탄(松灘) 정홍서(鄭弘緖, 1571~1648)

 

憶昔丙申秋九月   옛날 병신년 9월달 생각하니

棕鞋布襪此來遊   짚신에 버선발로 찾아왔었지

黃花夾岸香初動   양쪽 언덕에 국화꽃 향기 나고

紅樹臨江錦欲流   단풍 나무 강가에 비쳐 비단 물결

往事只留沙上月   지나간 일은 모랫가의 달에 남고

遺踪惟見水邊樓   끼친 자취는 물가 누각만 보이네

重來物色同華表   다시 오니 경색은 완연히 다르고

薄暮憑欄多少愁   저물녘에 난간에 기대 시름겹네

 

함허정: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 지곡(모실)마을 엄천강 언덕에 있다. 성종 시대 함양군수로 재임한 최한후(崔漢侯) 선생이 백성들에게 권농흥학(勸農興學)을 행하여 교화가 크게 흥하였는데 공무의 여가에 이곳에서 소요자적하였다. 만년에 도승지로 벼슬을 버리고 함양에 정착하였는데 그 아들들이 여기에 정자를 세웠다. 그 뒤 폐허가 되어 함허대만이 남았는데 후손 최석창이 광무 5년(1901) 에 중건하였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입구 길에 1970년에 세운 유적비가 있는데 ""통정대부도승지양성재최공유적비(通政大夫都承旨養性齋崔公遺蹟碑)""라 새겨져 있다.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의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에는 정유재란 때 진주성 함락시의 순국 의병장인 최변(崔忭)이 주인이라고 하였다. 최변은 <<여지도서>> 경상도 함양 인물 충신조에 정유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구에게 여러번 이기고 진양성에 들어가 전사하였고 진주 충렬사에 배향되었다고 하였다.(崔汴丁酉倭亂以義兵將累捷倭寇因入晉陽城死之配于晉州忠烈祠)

 

                                   함양군수 최한후가 간행한 <황산곡시집>의 책판을 후임 최연손이 불태우다

                             성종 13년(1482)에 전 거창현감(1479~1482재임) 유호인이 지은 <황산곡시집> 발문

 

                                                                                                                       뢰계(뢰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내가 마침 부모가 연로하다고 사직하고 함양에 돌아올 때《황산곡집 黃山谷集》1질을 성임(成任 1421-1484) 공에게 빌렸고 또 별집(別集) 산질을 그 아우 성현(成俔 1439-1504) 공에게 얻었다. 그것을 갖고 뇌계(水+雷 溪 상림 상류) 가에서 음미했는데 거창에 부임하게 되어 널리 펼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이때 김자행(金自行) 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하형산(河荊山) 공이 도사(부지사)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부탁해서 각수를 모집하여 판각하였다. 절반쯤 했을 때 가뭄이 들고 농사일이 급박해 즉시 편의상 이웃 고을에 나누어 판각하게 했는데 지연되어 해를 넘겼다.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채 나도 그만두고 돌아왔다.

지금 관찰사 이철견(李鐵堅 1435-1496, 1481.10~1482.7 재임) 공이 우리 고을 군수 최한후(崔漢侯) 선생에게 그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고을을 널리 감독하며 친히 오류를 바로잡아 한결같이 바르게 되도록 하였다. 겨우 열흘 만에 작업이 완료되었다."

《중종실록》중종 2년(1507) 10월 7일(정유)에 사헌부가 아뢰기를,

"봉상시 정 최연손(崔連孫)이 전에 함양군수를 역임할 때 그 아들의 장모 집이 고을 안에 있었는데 본래 빈궁하여 초가집을 짓고 살았었습니다. 연손이 부임한 지 6년 동안에 크게 기와집을 짓고 곡식이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황산곡집》의 책판이 고을에 있었는데 유림이 다투어 인쇄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연손은 그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그 책판을 불태웠으니, 이것은 선비가 차마 할 짓이 아닙니다. 그의 직책을 바꾸소서." 라고 하였다.

봉상시 정(정3품)에 임명되자마자 탄핵을 받았으니 이 바로 전에 함양군수를 역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연산군  8년(1502)부터 중종 2년(1507)까지 만 5년의 임기를 채운 것이다. 《황산곡집》은 중국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동파와 병칭되는 산곡 황정견의 시집으로 한국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교본이었으므로 널리 유행되었다. 화순 최씨 양성재(養性齎) 최한후가 성종 13년(1482) 에 함양군수로서 간행하였는데 그 20년 뒤의 후임군수가 유림들의 잦은 인쇄 요구에 싫증을 내어 발본색원 책판을 소각시켜 버린 것이다.

전주 최씨인 암계(巖溪) 최연손은 성종 11년(1480)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생원시에도 동시에 합격하였으며 성종 20년(148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 이조 참판(총무처 차관)까지 지낸 인물이니 그런 짓을 할 교양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번거로워서 그랬든 송시풍을 반대해서 그랬든 문화재는 사라진 것이다.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의 차남 최엄조(崔엄祖)가 함양 사람 남원 양씨와 혼인하였으니, 그 인연으로 전최 집안이 함양 주로 뇌산에 정착하게 된 것이리라. 최연손의 증조부인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도 세종 10년(1425) 12월 10일에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로 부임하였었으니 함양과 인연이 깊은 집안이다.

 

 등구창촌(登龜倉村) - 우담 정시한의 지리산과 덕유산 유람 - <산중일기>

 

 1686년 숙종 12년 병인 3월  퇴계학파 성리학자 원주 거주 우담 정시한 영호남 여행. 4월 11일 아침에 거창 출발, 사근역에서 말 먹이 주고 저녁에 함양읍 냇가 서쪽 서원촌(백연서원) 김후달(金後達) 집에 도착, 군수 심도명(沈道明,沈澈의 字)이 방문, 같이 숙박. 12일 냇가 방축 구경. 13일 최고운과 김점필을 모신 백연서원 참배, 심원록(尋院錄)에 서명. 이은대에 등람, 식후에 서계 유람. 14일 아침에 매일 동숙하던 군수와 작별, 오후에 안양사(安養寺: 휴천면 문정리 법화사)에 도착. 15일 여암(驢巖), 삼성대(三聖臺), 용유당(휴천면 용유담) 유람, 오후에 군자사 도착, 향로당에서 숙박. 16일 진사 박세혁 내방, 저녁 금대암 방문, 안국사 향로전에서 숙박. 17일 벽송암 종장 천륜(天倫) 내방, 저녁 서암 방문, 노승 정찬 영접. 19일 아침 두타암, 무량굴, 상무주 방문, 묘적암 수좌 사철(思哲) 내방. 20일 묘적암 방문, 상무주로 귀환. 21일 윤판옥 수리, 견성암 종장 자징(自澄), 묘적수좌 사철 내방. 22일 군자사 승통 법안 내방. 24일 지리산 산불. 25일 상무주암을 떠나 천인암(千人菴), 상고대암(上高臺菴) 방문, 오후 실상사 도착. 26일 고철불 관찰. 27일 저녁 천인암으로 이거. 29일 영기 수좌 실상사로 귀환. 윤4월 1일 견성암 왕래. 17일 도솔암에서 천왕봉 등정, 반야봉 유람, 저녁 칠불암 도착. 19일 금류동(金流洞) 도착. 5월 1일 삼일암 왕래. 6월 28일 군선요어(群仙要語) 3자 읽음. 7월 4일 황정경오장도 6장, 도장초(道藏抄) 10장 읽음. 5일 황정경채취도 이하 수십 장 종편 읽음. 23일 황정 오장도, 도장초 심신론(心神論) 읽음. 30일 저녁 연곡사 가서 비전의 선각선사비를 보다. 8월 4일 황정 도장초 17장 다 읽음. 6일 황정 채약도 등 10여 장 재독. 20일 불일폭포 관람. 화개동을 지나 구례현 화엄사 향로전 숙박. 부도암에 올라 연기(烟起)조사 석상, 선각조사 모친 석상 관람. 22일 운동 비전 참배, 실상사 도착. 24일 부도전에서 쉬고 견성암에 오르다. 25일 천인암과 상무주암에 오르다. 9월 2일 묘적암 방문, 박광선(朴光善: 함양읍내 서원<백연서원>촌에 산다고 함) 내방. 3일 묘적암에서 천인암으로, 견성암으로 하산하여 군자사 도착. 저녁 후에 말 타고 금대암 방문. 7일 금대암 출발 등구창촌(登龜倉村) 도착, 안국동암 각자승(刻字僧) 채간(綵侃) 동행 오도재 넘어 제안역촌에서 비를 만나 무릅쓰고 전진, 함양읍 냇물 서쪽 백연서원촌 김후달(金厚達) 집에 도착. 저녁 사근찰방 우홍성(禹弘成)과 함양군수 내방. 8일 아들 정항, 김후달과 이은대에 올라 함양읍내를 바라보고, 걸어서 학사루에 가서 등람. 군수와 작별하고 개평촌에 도착, 상주 출신으로 장가온 생원 황재겸 집에 숙박. 이하 생략(1997년 9월 23일 화요일 우담전집에서 함산 초록)

정시한 [, 1625~1707]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나주()
  우담()
별칭   자 군익()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우담집》,《산중일기》

본문

본관 나주(羅州). 자 군익(君翊). 호 우담(愚潭). 독학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원주(原州)에 은거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의(執義) ·사업(司業)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뒤에 진선(進善)에 올라 1691년(숙종 17) 앞서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가 삭직,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96년 희빈(禧賓) 장(張)씨의 강호(降號)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당파를 초월하여 자기 소신을 밝혔다. 1704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정약용(丁若鏞) ·이익(李瀷)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주의 광암사(廣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술에 《우담집》을 비롯하여 《산중일기》 《임오록(壬午錄)》 《관규록(管窺錄)》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산중일기 []

요약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정시한(:1625~1707)이 삼남 일대를 돌아본 기행록.
 
구분   기행록, 필사본
저자   정시한()
시대   조선시대(1686~1688)
소장   고려대학 중앙도서관

본문

필사본. 2권 2책.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1686년(숙종 12) 3월 13일에 원주(原州) 본가를 출발하여 청주 공림사(空林寺)를 거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등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각 도의 명산과 고찰을 돌아보고, 겸하여 저자의 친척집을 두루 방문한 다음 1688년 9월 19일 원주 대야(大野)의 본가로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이다. 이 정확한 기록은 당시의 사찰(寺刹) 현황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우담선생문집(愚潭先生文集)》 권19∼20에 수록되어 있으며,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민영규(閔泳珪) 교수의 집교(輯校)로 인문과학자료총서(人文科學資料叢書) 제1집으로 영인(影印) 간행하였다.  

 

                     지리산 천왕봉

 

    請看千石鍾   천 섬짜리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聲   크게 치면 소리가 나나니      

    萬古天王峯   만고에 유유한 천왕봉은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나니    

 

이 시는 지리산을 좋아하여 12번 이상 답사한 남명 조식 선생이 천왕봉을 읊은 것이다.

아무리 큰 종이라 해도 큰 당목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만 천왕봉은 하늘이 벼락을 치고 별짓 다하며 울게 해도 미성도 내지 않는다는 뜻이니 천왕봉처럼 큰 무게를 지녀야 함을 묘사한 것이다.

남명선생은 벼슬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진이로 천거되어 바로 6품 벼슬에 임명되었다. 6품 벼슬은 지금 일반인을 바로 사무관에 임명한 것처럼 파격적인 등용이다.

그러나 남명선생이 사양하며 벼슬하지 않자 시비꾼들이 벼슬자리가 보잘것없어 사양한 것이 아니냐, 보다 높은 벼슬을 주었다면 아마 벼슬했을 것이라고 입방아찧자 남명선생이 이 비유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다.

비록 천 석짜리 큰 종같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를 주더라도 받는다면 결국 벼슬 욕심에 동한 것이다.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는 천왕봉같이 벼슬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는 태상은자로 살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번에 함양에서는 인산의학재단의 후원으로 제2회 지리산문학제(위원장 김윤수)가 열렸다. 함양 출신 허영자, 오인태, 산청 출신 강희근, 섬진강 시인 김용택, 접시꽃당신의 도종환 등 전국의 유명 시인이 모여 문학의 밤을 전개하였다. 이때 지리산문학상과 최치원신인문학상도 시상하였다.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이다.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행정구역상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100번지이고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208번지이다. 지금 지리산 북쪽의 함양군과 동쪽의 산청군이 양쪽에 걸친 천왕봉을 갖고 서로 자기 관내라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과학적 측량도 좋지만 함양군과 산청군이 공유하면 안되는가.

지리산문학제에서 시상하는 지리산문학상과 최치원신인문학상은 전국에 공모하여 지역에 상관없이 선정한다. 그래서 시상주체인 지역 시인들이 오히려 소외감을 느낀다. 한가지 제언을 한다면 지리산문학제에 천왕봉문학상을 신설하여 천왕봉이 자리한 함양이나 산청 출신의 지역 시인을, 산청은 원래 산음이었으니 함양과는 음양이 조화된 이웃사촌 고을인바, 홀수 해에는 함양 시인을, 짝수 해에는 산청 시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한다면 함양군과 산청군이  천왕봉을 인연하여 분쟁이 아니라 화합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 지리산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진주시, 하동군, 구례군, 곡성군, 남원시, 장수군, 거창군, 함양군, 산청군이 지리산특별자치도나 지리산광역시를 설립하여 지역공동체를 형성한다면 영호남정서의 완충지대로서 남북과 함께 동서의 민족화합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007.10.11 경남일보 경일춘추, 2007.12.26 함양문학 16호)

 

제2경. 인산초당

  

        인산초당   仁山草堂

 

     김윤수 작, 역

 

지산심곡행화정   智山深谷杏花亭   지리산 깊은 골짝에 행정마을 있는데

정유행단행수청   庭有杏壇杏樹靑   뜰에는 행단이 있고 행림이 푸르네

신은훈몽고목기   新隱訓蒙刳木器   은둔하여 동몽을 가르치고 함지박 파며

일구천문야관성   日究醫藥夜觀星   날마다 의약 연구, 밤에 별을 관찰하네

 

인산초당  함양군 휴천면 월평리 죽염골 살구징이 행정마을 인산선생은거처, 삼남출생지, 죽염실험지,  인산선생부인묘소, 인산죽염도시

 

        인산 애송시

 

백의관음무설설   白衣觀音無說說

남순동자불문문   南巡童子不問問

병상녹양삼제하   甁上綠楊三際夏

암전취죽시방춘   巖前翠竹十方春

 

인산 김일훈 선생 해설

 백의관음 무설설이라, 백의 관세음 보살은 꼭 말씀할 듯하고 안 하신다. 무설설이야. 말씀을 할 듯한데 말씀은 안 해. 남순동자불문문이라. 남순동자는 묻고 싶은데 묻지를 못해. 말씀 안 하니까. 그런데 병상녹양삼제하하고. 병에다가 심어놓은 버들은 삼제 여름인데, 암전취죽은 시방춘이라 암전취죽은 언제고 푸르러 있어. 항시 봄이야. 시방에 늘 봄이야. <활인구세>

 

백의관음무설설   白衣觀音無說說

남순동자불문문   南巡童子不聞聞

병상녹양삼제하   甁上綠楊三際夏

암전취죽시방춘   巖前翠竹十方春

 

백의관음은 말씀없이 말씀하시고

남순동자는 들음없이 들으시네

꽃병 위의 푸른 버들은 삼세 여름이고

바위 앞의 파란 대는 시방에 봄이네

 

불초삼남 김윤수 근역<함양문학 11호, 2002.11>

 

                       등구사   登龜寺

 

                                     저촌(樗村) 심육(沈錥, 1685~1753)

 

少歇登龜寺   등구사에서 조금 쉬고는

旋經悟道山   바로 오도산을 넘어가네

頭流行應遍   두류산을 두루 돌아다녔으니

鞍馬且將還   말에 안장 짓고 돌아가련다

是處窮幽賞   이곳에서 다 그윽히 감상하고

玆遊儘博閒   이번 유람길 한가함을 다했네

花林今夜月   화림동의 오늘 밤 달빛 아래

兄弟更承顔   형제가 다시 얼굴 마주 하리

 

                      오도봉에서   悟道峰

 

                                         뢰계(뢰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悟道峯頭快遠眸   오도봉 마루에서 멀리 바라보니

頭留萬疊彩雲收   두류산 겹겹이 채색 구름이 덮혔네

若爲招得無言子   말없는 신선을 불러올 수 있다면

霞佩相隨汗漫遊   신선 패옥 차고 질펀히 노닐 터인데

 

역주: 오도재의 유래에 대하여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靈源寺)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청매(靑梅) 인오조사(印悟祖師)(서기1548~1623년의 西山의 弟子)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한 연유로 오도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해설하나 청매보다 1백 년 앞선 유호인 이전부터 오도봉이라고 하였으니, 청매 인오 조사의 오도(悟道)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제한역   蹄閑驛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 1345 ~ 1405)

 

    雲峰坂道並溪傍   운봉 가는 비탈길 시냇가에 나란히

    穩跨征驢一嘯長   나귀에 걸터앉아 휘파람 길게 불고

    無賴西山高萬丈   아득한 서쪽 산은 높이가 만 길

    客來投舘未斜陽   길손은 해지기 전 객관에 투숙하네

 

역주: 제한역을 가는 비탈길 옆 시내는 구룡천(점필재 명명 서계)이고 서쪽 산은 팔령재(팔량치)로 제한역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아득히 높아 해도 지기 전에 지레 겁나 등정을 포기하고 객관에 투숙한다는 뜻이다.

제한역은 지금의 함양읍 구룡리 조동마을에 있던 조선시대 역마의 역이다. 제한역은 함양 사근도 찰방이 관할하던  14개 속역의 하나로 지금 하동의 토지문학제가 열리는 평사리도 본래 사근도의 속역인 평사역이었다. 제한역 남쪽 고개 제한재 현 지안재를 넘어 오도재를 넘으면 지리산 칠선계곡 입구이다.

 

                           오도재 죽염골

 

    雲峰坂道並溪傍   운봉 가는 비탈길 시냇가에 나란히     

    穩跨征驢一嘯長   나귀에 걸터앉아 휘파람 길게 불고

    無賴西山高萬丈   아득한 서쪽 산은 높이가 만 길        

    客來投舘未斜陽   길손은 해지기 전 객관에 투숙하네     

 

이 시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쌍매당 이첨이 제한역을 읊은 것이다. 비탈길 옆 시내는 구룡천(점필재 명명 서계)이고 서쪽 산은 팔령재(팔량치)로 제한역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아득히 높아 해도 지기 전에 지레 겁나 등정을 포기하고 객관에 투숙한다는 뜻이다.

제한역은 지금의 함양읍 구룡리 조동마을에 있던 조선시대 역마의 역이다. 제한역은 함양 사근도 찰방이 관할하던  14개 속역의 하나로 지금 하동의 토지문학제가 열리는 평사리도 본래 사근도의 속역인 평사역이었다.

제한역 남쪽 고개 제한재 현 지안재를 넘어 한 구비 돌면 옛 월평분교에  인산의학죽염도시와 사단법인 인산의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인산의철학은 대학이나 박물관 하나 없어 학술문화의 소외지라 할 수 있는 함양에서 유일한 학술연구기관으로 2007년도에 한국동양철학회와 함께 '동양철학과 한의학'이란 주제로 동계학술대회를 열어 최은아 인산한방암센터 대표이사가 '인산의학의 암원리'를, '동양철학과 정신건강'이란 주제로 하계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김윤수 인산의철학 이사장(자연치유학 명예박사)이 '인산의철학과 정신건강'을 발표하였다.

지리산 가는길 오도재 정상에 지리산제일문이 우뚝 서있고 남쪽에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지리산조망공원이, 북쪽에 변강쇠타령의 발원지 변강쇠장승공원이 있고, 못미처에 하늘아래 첫동네 살구징이란 마을이 있는데 길 건너편에 인산초당 터가 있다.

인산 김일훈 선생이 한국전쟁 후에 남하하여 이곳에 은거하며 한문과 의학을 가르치고 죽염을 실험 제조하여 죽염 굽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죽염골로 불렸다. 인산초당을 복원하여 중국 성도의 두보초당, 강진의 다산초당과 함께 세계 3대 초당으로 정립할 계획이다.

금년에 인산선생의 손녀가 함양여자중학교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손자가 함양중학교 학생으로 민족사관고등학교에 합격하였다. 팔불출의 셋째가 자식 자랑이라고 한다. 자랑이 팔불출이 아니라 덕보려는 짓이 팔불출인 것이다.

자랑스럽다 이 말은 얼마나 좋은가. 공해독의 암병에 대응하여 활인핵 암약 오핵단, 사리장, 죽염을 발명하여 보급하고 한방암의학 인산의학을 정립하고 유황오리, 다슬기, 홍화씨 등 수많은 개발 식약을 대가없이 공개한 성인의 어진 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다만 부친인 인산선생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또한 자녀에게 자랑스러운 부친이 되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다. 한편으론 자녀가 남들 놀 때 공부 열심히 해서 일류대와 일류고를 들어간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왜 팔불출이라는 말로 자랑스러움을 부도덕시해야 하는가.

자랑스러워하자.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자.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하자. 부친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자녀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기 위해, 나아가 자랑스러운 함양인, 경남인, 한국인, 세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할 일이다. 서로 노력하고 격려하자.  (2007.10.18 경남일보 경일춘추, 2007.12.26 함양문학 16호)

 

                2007 三祝 紀念詩

 

                                          김윤수 작, 역

 

法治人民秩序明   법으로 인민을 다스려야 질서가 밝고

史觀定立國魂榮   사관이 정립되어야 국혼이 영화로우리

博施濟衆仁山訓   널리 베풀고 중생 구제 인산의 가르침

韓族率先天下平   한민족이 솔선하면 천하가 태평해지리

 

法은 장녀 김예정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축하 기념자

史는 차남 김정근 민족사관고등학교 합격 축하 기념자

博은 본인 김윤수 자연치유학 명예박사 취득 축하 기념자

 (2007.12.26 함양문학 16호)

 

제3경. 상림

                         대관림(大館林: 상림의 고칭)

 

                                       점필재 김종직

 

激激淸뢰郭外音   성밖에는 콸콸 흐르는 맑은 뇌계의 물소리

獨吟騷句爽煩襟   홀로 시구 읊조리니 답답한 가슴 시원하다     

有時柱杖攔歸鶴   때로는 지팡이로 돌아오는 학을 막는데        

落日霜飛大館林   해 저문 대관림에는 서리가 날리는구나        

 

                           위성 장림   渭城 長林 五十員 耆老會韻

 

                                       연봉( 蓮峯) 임병홍(林炳洪)

 

老去人生可樂天   늙으막 인생에서 천분을 즐길지니

吾鄕壽域好山川   우리 고장은 장수 고을 좋은 산천

正値黃梅新霽雨   5월달 새로 비개인 날을 만났으니

聊將白髮惜餘年   백발일지라도 여생을 애석해 하세

渭月千秋來呂수   위천의 달 천추에 강태공을 비추고

林風十里憶崔仙   숲 바람 십리에 최고운을 추억하네

伊今更擬西都事   지금 다시 서도태수의 풍류를 본따

願得壺觴日日連   술병을 얻어 날마다 술 마셨으며는

 

역주: 서도태수의 풍류

한정록 제5권 유흥(遊興)

전 문희(錢文僖 문희는 전유연(錢惟演)의 시호)가 서도(西都)의 태수로 있을 때 사희심(謝希深)과 구양영숙(歐陽永叔 영숙은 구양수(歐陽修)의 자)이 함께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숭산(嵩山)을 유람하고 영양(穎陽)을 거쳐 돌아오다가 저물녘에 용문(龍門)의 향산(香山)에 닿았다. 조금 있자 눈이 내렸으므로 두 사람은 석루(石樓)에 올라 도성(都城)을 바라보았는데, 각기 품은 회포가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연애(煙靄)가 자욱한 속으로 이수(伊水)를 건너 달려오는 거마(車馬)가 있었다. 도착하고 보니, 전문희가 보내는 음식과 기생이었다. 와서는 전공(錢公)의 말을 전하기를,

“산 유람이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빨리 돌아오지 말고 잠시 용문에 머물면서 눈 경치나 구경하시오.”

하였다. 그의 활달한 마음과 인재를 사랑하는 아량이 이와 같았다.

 

        사운정  思雲亭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1909~1992)

  

천강유선수식림   天降儒仙手植林

위성시백읍상심   渭城詩伯揖相尋

대황대야금파동   大黃大野金波動

장벽장공옥로심   長碧長空玉露深

지락고금신성지   志樂古今神聖志

심통역대준웅심   心通歷代俊雄心

사중현사치평일   社中賢士治平日

거세효친송덕음   擧世孝親頌德音

 

 

하늘이 내린 선비신선 심은 상림에서

위성음사의 시인들 서로 읍하며 찾네

크게 누런 큰 들에 황금 물결 움직이고

길게 푸른 긴 하늘에 옥같은 이슬 짙네

뜻은 고금 성현의 뜻을 즐거워하고

마음은 역대 영웅의 마음을 통하네

위성음사의 어진 회원들 태평 시대에

온 세상이 효도스런 덕성을 칭송하네

  

   불초삼남 김윤수 근역

  (2006.12.26 함양문학 15호)

 

                         가곡상림(歌曲上林)

 

    學士爲民防水森   고운학사 백성 위해 홍수 방지 숲을 만들고

    醫仙作律思雲吟   인산의선 율시 지어 고운 사모의 정 읊었네

    竹鹽祝祭天人協   함양죽염축제에 천연과 인간이 조화 이루어

    歌曲淸音響上林   예술가곡의 맑은 소리 상림에서 울려퍼지네

 

이 시는 필자가 함양죽염축제 가곡상림을 읊은 것이다. 상림은 천연기념물이고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이다.

아름다운 것은 가치 있다. 고운 햇살 아래 미풍에 한들거리는 분홍빛 꽃잎이 투명하게 아롱지는 모습을 보면, 맑디맑은 냇물이 연한 초록 잎사귀와 푸른 하늘을 담고 가을과 꽃둔덕을 따라 졸졸 흐르는 냇가를 거니노라면 누구도 자기 영혼이 미소짓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에게는 에너지가 있고 기운이 있고 운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마음이 평온하고 웬지 기분이 좋으면 나쁜 일이 잘 안 생긴다. 신경질 나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면 하루종일 기분 나쁠 일만 생기는 것 같고 매사가 다 불만스러워진다. 마음이 참으로 중요한 열쇠이다.

아름다운 것을 느끼고 아름다운 것에 감동하는 순간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평온하게 가라앉혀 주고 좋은 기분으로 만들어주고 그래서 운도 열어주는 것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좋은 그림, 좋은 음악, 좋은 미담을 들려주는 교육을 하는 이유도 아이들의 정서를 순화시켜 마음을 긍정적인 에너지 상태로 만들어주는데 있다. 그것이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식인으로 육성시키는데 유효하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순화된 상태에서 과학과 수학을 공부하면 훨씬 더 고도의 과학적 발명과 수학적 사고를 익힐 수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 경남에는 특히 함양같은 산골에서는 격조높은 예술을 접할 기회가 적다. 서울이나 부산같은 대도시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유명 음악회나 미술전이 열리지만 지방 군읍단위에는 아예 없다. 이번에 인산죽염촌이 메서나사업의 일환으로 죽염의 발명가 인산 김일훈 선생을 기리고 죽염문화를 예술로 승화하는 제2회 함양죽염축제(위원장 최은아) 가을맞이 가곡의 밤을 개최하여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을 초청하여 아름다운 천년의 숲 상림에서 가곡상림을 선보였다. 아울러 지속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기구로 인산의학죽염도시가곡상림위원회도 구성하였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가곡을 좋아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을맞이 가곡의 밤도 자주 참석했는데 그 때의 감흥도 감흥이지만 노을이 지고 별이 뜨는 가을 하늘 아래 숲으로 둘러싸인 함양 상림 다볕당 잔디마당 자연 무대에서 인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의 반주로 테너 엄정행 등 유명 성악가들이 청아한 육성으로 부르는 천상의 선율이 대자연과 합주하는 신비감은 그 어느 것에도 비할 바 없었다. 맑은 숲내음을 맡으며 자연을 배경으로 가곡을 듣노라니 온몸이 음악을 호흡하는 느낌이었다.

이날 운집한 관중이 2천여 명 정도 되는데 남녀노소 숨을 죽이고 하늘과 바람과 숲과 음악에 몰입하는 광경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였다. 어린 학생들이 수많은 어른들 틈에서 좌석이 모자라 잔디밭에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장장 1시간 반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너무도 진지하게 음악에 빠져드는 모습은 더욱 감격적이었다. 우리나라 가곡이 이토록 자연과 숲과 어울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대자연의 상림  숲은 그 자체로 독일의 발트뷔네처럼 세종문화회관 부럽지 않은 문화예술의 전당이었다. 가곡상림은 음악과 자연과 청중이 어우러진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2007.10.04 경남일보 경일춘추, 2007.12.26 함양문학 16호)

 

                        군수 조후 병갑 청덕 선정비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

 

先侯之思(선후지사)   선임 원님을 생각하니   

遺民是撫(유민시무)   유민을 어루만지고

削廩繕廨(삭름선해)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減租蠲布(감조견포)   조세와 부역을 감해 주며

束薪政嚴(속신정엄)   백성의 재물은 하나도 취하지 않고

食蘗心苦(식벽심고)   청빈한 마음은 고생스러웠네

牛刀二載(우도이재)   2년 동안 큰 재주를 썩혔으나

龜趺千古(구부천고)   천년만년 돌거북에 비석 자리하리

 

光緖十三年丁亥七月 日(高宗二四年 一八八七年)

 

 ※ 조병갑(趙秉甲/?~?)

조선 후기의 탐관(貪官). 본관 양주(楊州). 1892년 4월 28일 고부군수 부임. 1893년(고종 30) 고부군수(古阜郡守)로서 만석보(萬石洑:貯水池)를 증축할 때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를 징수 착복하였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목을 씌워 재산을 착취하는 한편,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부친의 비각(함양군수 선정비각도 세웠다)을 세운다고 금품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다.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했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학정을 가중함으로써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한 직접 원인이 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의 습격을 받았으나 도피, 뒤에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전라도 고부군은 드넓은 평야와 해안까지 끼고 있어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물산(物産)이 풍부하기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곳에 1892년 4월 28일 조병갑(趙秉甲)이 군수로 부임한 이래,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그의 수탈 방법은 원래 있던 보(洑: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를 허물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새 보를 만든 다음 그 농민들에게서 수세(水稅)를 거두었고, 예전에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를 세운다며 고부 농민들로부터 돈을 빼앗았으며, 돈 가진 자들을 불효(不孝), 불목(不睦:사이가 서로 좋지 않음), 음행(淫行), 잡기(雜技:여러 가지 노름) 등 갖가지 죄목으로 엮어 가둔 후 속전을 받고서야 풀어 주는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제1차 응징 대상인 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나자, 통문의 서명자 집단의 거사계획은 당분간 보류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난 군수 조병갑은 전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계속 고부 관아에 남아 있으면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재취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전봉준은 사발통문의 거사 의지를 누르고 전주감영에 다시 수세감면을 비롯한 폐정을 호소했으나 김문현은 이들을 몰아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었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임명된 하루 뒤 드디어 고부군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즉 고부의 농민 5백여 명이 1894년 갑오년 1월 9일 예동(禮洞) 마을에 모여들었고, 10일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그날로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창고를 열고 양곡을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새로 쌓은 만석보(萬石洑)를 헐어 버리고 탐학(貪虐:탐욕이 많고 포학함)한 향리를 처벌한데 이어 조병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관아에서 나온 농민들은 말목장터에 진을 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사발통문의 3개 결의내용이 실행된 것이다. 이것이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시발이다.

 이 선정비는 함양 상림 역사인물공원 내 선정비림 속에 서 있어 철거 요구를 받지만 조선시대 군민이 세운 120년 된 유물로서 가치 있고, 선정비의 실상을 밝히는 역사 유적으로 가치 있으니 보존되어야 한다.

 

                         함양 학사루   次咸陽學士樓題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1455)

 

頭流山迫白雲間   두류산은 흰구름 사이에 솟고

傍麓經營問幾官   기숡에는 여러 고을이 있네

最是許州鍾秀氣   허주가 가장 빼어난 기가 모여

稟生人傑滿朝端   인걸을 낳아 조정에 가득하네

 

역주: 함양은 고려 성종 14년(995)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되었다.

 

       학사루 주련   學士樓 柱聯  

 

               작자 미상

 

七月蟬聲滿一樓 칠월선성만일루

칠월의 매미소리 누에 가득한데

登臨回顧叉傷秋 등림회고차상추

누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가 깊구나

長林上下高城出 장림상하고성출

긴숲 위아래로 높은 성이 우뚝하고

大野東南二水流 대야동남이수류

한들의 동남에 두 냇물이 흐르네

學士已乘黃鶴去 학사이승황학거

학사는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렸는데

行人空見白雲留 행인공견백운류

행인은 부질없이 흰구름만 바라보네

可憐風物今猶昔 가련풍물금유석

가련타 풍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常有詩篇揭軒頭 상유시편게헌두

언제나 추녀끝에는 시편이 걸려있네

글씨: 진주출신 야천 임재동 <천령의 맥>

 

                                                       학사루에서 임진왜란 격문을 초한 대소헌 조종도

 

 임진년 4월에 병환을 무릅쓰고 한성에 이르렀는데, 왜노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에 서애 유상국의 문을 두드려 서로 영결하고서 돌아왔다. 중도에서  의령인 전 전적 이노를 만났는데 이도 한성에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서로 약속하기를 “행차가 영남에 이르면 의병을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자. 일이 성사되지 못하면 죽을 뿐이다.”고 하였다. 마침 초유사 김학봉을 함양에서 만나니 기뻐하며 곧 더불어 학사루 위에서 격문을 초하였다. 군현에 드나들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뒷날의 왜적 저항의 근본은 다 선생의 힘이었다.

壬辰四月。彊疾戾洛。卽聞倭奴渡海。夜叩西厓柳相國門。相與永訣而歸。中路逢宜寧人前典籍李魯。李亦自京而歸。相與約曰。行到嶺南。倡起義兵。以討兇賊。事若不克。死而已。適遇招諭使金鶴峯於咸陽。喜卽與草檄於學士樓上。出入郡縣。奮倡士氣。他日抗賊張本。皆先生力也。<大笑軒先生逸稿卷之二 行狀>

 

                                           학사루에서 간행한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의 이계(耳溪) 홍양호 서문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이 간행한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로 인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절교 사건

 

신하로서 난리에 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진실로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공자님은 살신성인, 맹자님은 사생취의(생을 버리고 의를 취함)라고 칭찬하신 것은 대개 천명의 바른 이치를 얻고 만세의 큰 강령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식견이 충분히 그 미연에 밝게 알고 그 말이 장차 위태로움을 구제할 수 있음에도 힘이 못 미쳐  마침내 몸으로 순절한다면 군자는 더욱 그 뜻을 슬퍼하고 그 죽음을 애석해하는 것이다. 나는 충헌공 윤공의 강화도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책을 덮고서 탄식한다.

아, 병자호란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순국한 여러 현자들의 절의는 찬연하여 다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을 것이다. 유독 충헌공은 청나라 사신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이미 화친을 거절하여 조정과 재야가 흉흉한데 정부는 태연하게 아무런 방어 대책 하나 계획함이 없구나.” 하였으니, 그 일에 앞서 걱정한 것이 이러하였다.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갔을 때 재상에게 글을 올려 김경징(金慶徵, 1589~1637,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강화가 함락되자, 수비 실패를 이유로 대간(臺諫)에게 탄핵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과 이민구(李敏求, 1589~1670, 병자호란 때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려 하였으나, 적군이 어가(御駕)의 길을 막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후에 돌아와 경기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강화 함락의 책임으로 아산(牙山)에 귀양가고 1643년 영변(寧邊)에 이배(移配)된 후 1649년 풀려났다. )가 적을 얕보며 방비를 소홀히 한 죄를 통렬히 배척하면서, 급히 명령하여 나루터에 주둔하여 병력을 과시하고 배를 거둬들이고 안으로는 임시 수도의 방어를 공고히 하고 밖으로는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원하자고 요청하였으나 말이 끝내 쓰이지 않아 청나라 군대가 나루를 건너와 한 섬이 와해되고 대신과 종신들이 서로 불길에 뛰어들고 지사와 용사들이 나란히 칼날 아래 죽음을 맞는 일이 벌어졌다.

비록 나라를 그르친 자의 살점을 씹어먹더라도 어찌 일에 보탬이 되겠는가. 오호라, 진실로 공의 말이 화친을 거절한 초기에 쓰였다면 어찌 창졸히 파천가는 사태가 있었겠으며 천연 요새(강화도)를 방수하는 시기에 쓰였다면 어찌 유린당하고 섬멸당하는 재앙에 이르렀겠는가.

공같은 이는 살아서는 위급을 부지한 충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나라에 보답한 마음을 밝혔다고 할 만하다. 중심에 보존된 것이 소양이 있지 않으면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대개 들으니 공은 어려서 우계(牛溪 성혼)와 사계(沙溪 김장생) 두 군자를 따라서 배웠다고 했고 또 중형인 팔송공(八松 윤황)과 함께 대간의 풍모를 지니고 침체되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그 학문이 근본한 바가 있고 하루아침에 강개하며 생명을 버리는 자와 비길 바 아님을 알겠다.

공이 몰한 뒤에 이미 증직하였고 또 사당도 세웠으니 높여 보답하는 도리에 남은 유감이 없는 것이다. 지금 공의 후손 함양 수령 광석이 공의 순국 사실과 유문 및 행장 등을 모아 판각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하며 내게 글을 요청하였다.

아, 이 책의 편성은 백세토록 신하된 자를 권면하는 것이고 비단 한 집안의 문헌이 될 뿐만은 아니다. 나는 평소 공의 의리를 사모하여 운전대라도 잡고 싶었지만 오히려 당시의 깊은 학식과 강직한 논의가 이렇게 위대한 줄은 몰랐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발휘하고 선양하여 후세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의 논의가 실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고 목숨바친 큰 절의만이 아님을 알게 하는 바이다.

숭록대부 전행이조판서 겸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홍양호(洪良浩, 1724 ~ 1802) 근서

 

                              尹忠憲公實紀序

 

人臣之臨難致命固職分之常也 而孔子許以殺身成仁 孟子稱以舍生取義者 蓋以得天命之正理 植萬世之大綱也 然其識足以燭於未然 其言足以救其將危而力有不及終以身殉之 則君子尤悲其志而惜其死也 余於忠憲尹公之死江都 爲之掩卷而於邑也 噫丙子之事 尙忍言哉 當時殉國諸賢 節義焯然 皆可以有辭於天下後世 獨忠憲當北使之起釁也 言于人曰 我旣絶和 朝野洶洶 廟廊恬然 曾無畫一籌爲備禦之謨 其先事之憂如此 及夫廟社之入江都也 上書宰相 痛斥金慶徵李敏求玩寇弛備之罪 請急令 進駐津口 耀兵整檝 內鞏分都之守 外援南漢之危 而言終不用 以致北兵飛渡 一島瓦解 大臣從臣 相率入於烈火之中 志士勇夫 騈肩死於鋒刃之下 雖食誤國者之肉 何補於事 嗚呼 誠使公言 見用於絶和之初 則豈有倉卒奔播之擧 見用於保守天塹之時 則奚至蹈躪芟夷之禍乎 如公可謂生而盡扶顚之忠 死而明報國之心 非存於中者有素養 何以及此 蓋聞公少從牛溪沙溪兩君子遊 又與仲兄八松公 竝立臺端 風裁自 持 沈抑而不悔 則可見其學有所本而非一朝慷慨捐生者比也 公歿後 旣贈其官 又立祠焉 崇報之道 靡有餘憾 而今公耳孫咸陽宰光碩甫 裒公死事始末及遺文狀誌 將刻木而傳後 徵辭於不佞 噫是編之成 可以勸百世爲人臣者 非直爲一家之文獻也

良浩 平日慕公之義 願爲之執鞭 而猶未詳當時深識鯨論若是其偉也 故獨於此發揮而表揚之 使後之攬者 知公之言議 實關國家之存亡 而不亶致命之大節而已

 

崇祿大夫 前行吏曹判書 兼知經筵春秋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洪良浩 謹序

 

  박지원의 『연암집 燕巖集』에 「여윤함양광석서 與尹咸陽光碩書」가 있는데 이는 윤광석에게 절교를 선언하는 편지이다. 박지원은 정조 16년(1792)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뒤 그 2년 전(정조14,1790)에 함양군수로 와 있던 윤광석과 이웃 고을 수령으로서 친하게 지내었다. 그런데 윤광석이 이임(정조19,1795)에 임하여 서둘러 자기 조상 후촌(後村) 충헌공(忠憲公) 윤전(尹烇 1575-1636)의 실기 곧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 일명 『후촌집 後村集』을 간행함으로써 그 내용에 박지원의 조상인 기재(寄齋)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윤전의 요직 진출을 방해했다고 나쁘게 묘사한 글로 인하여 관계가 악화되고 말았다. 연보의 인조대왕 원년(熹宗天啓三年癸亥) 경기도사 임명조 기사에, 박동량이 계축옥사의 빌미를 제공한 일을 윤전이 비판한 것으로 인해 그 당파를 사주하여 윤전이 대간이 못 되게 하고 외직으로 나가게 했다는것이다.

 박지원과 윤광석이 죄수 심문 일로 인하여 모였다가 헤어질 때 윤광석이 『후촌집 後村集』의 원고를 내주며 교열을 부탁하였는데 박지원은 원고의 교정 상태가 어지러워 대충 보고 말았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자기 조상 이야기가 있는 것을 간과하였으니 윤광석 측에선 묵인한 것으로 오해하고 문제가 없다고 파악하고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뒤늦게 박지원 문중에서 내용을 보고 박지원을 힐난하니 박지원은 졸지에 조상을 욕보이는 일에 동참한 패륜아가 된 것이었다. 박지원은 이 책을 함양의 학사루에서 간행할 때 안음의 각수승(刻手僧)을 보내어 지원하였고 그 현장을 방문하여 격려한 입장이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조 16년(1792)에 윤광석이 함양군 서계(西溪)에 흥학재(興學齋)를 세우자 그 기문을 지어주었으니 『연암집』에 있는 「함양군흥학재기」이다. 정조 17년(1793)에 안음의 여인으로 함양의 임술증(林述曾)에게 시집간 밀양박씨가 남편을 따라 순절하자 박지원은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고 윤광석과 산청현감 이면제(李勉齊) 등도 열녀전을 지었다. 정조 18년(1794)에 윤광석이 학사루가 퇴락하자 자기 봉급을 털어 크게 중수한 뒤 박지원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짓게 하였으니 그것이「함양군학사루기」이다. 정조 19년(1795)에 윤광석이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를 간행함에 미쳐 박지원을 연루시킴으로써 둘은 절교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인간 관계는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얽혀 있으니 이것을 초월하기는 어려운 일임을 박지원의 절교 사건에서 실감할 수 있다.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는 3권 1책으로 그 책판이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최치원과 김종직 향사)에 간직되어 있었는데 서원이 훼철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다.

 

                         위성관 모선 설화   毛仙接話渭城館

 

                                                     종산(鍾山) 이원명(李源命) 1807(순조 7)∼1887(고종 24)

 

판서를 지낸 김상성(金尙星 1703~1755)이 경상도 관찰사일 때 순행차 함양에 이르러 위성관에 묵었다. 야반에 고요할 때 침문이 살짝 열리며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공이 놀라 누구냐고 물으니, 삼가 소회가 있어 순상을 뵙고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하였다.공이 일어나 촛불을 켜라고 하니, 상공이 이 괴이한 꼴을 보면 반드시 놀랄 것이니 촛불을 밝히지 마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공이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니 온몸이 다 털로 덥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옛날의 모녀(毛女)냐고 하니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저는 본디 상주 땅의 우주서입니다. 중종조에 명경과에 등과하여 정암선생에게 사사하고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 때 김정, 이장곤 등이 체포될 때 서울에서 도망하여 바로 지리산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날 굶주려 배를 채울 길이 없어 산 과일을 따먹으며 겨우 굶주림을 면하였습니다. 조금 지나자 설사가 일어나드니 5~6일이 지나자 온몸에 털이 나 몇 치나 자랐습니다. 이로부터 배고프지도 춥지도 않았고 먹고사는 근심이 없어졌습니다. 걸음걸이도 가볍더니 점차 나는 듯해졌고, 절벽과 낭떠러지도 뛰어넘기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하략) <동야휘집(東野彙輯)>

역주: 위성관은 함양 관아의 객사 본관으로 현 함양초등학교 자리이다. 그 문루가 현재 남아 군청 앞에 이전되어 있는 학사루이다.

김상성(金尙星 1703~1755): 본관 강릉. 자 사정(士精). 호 도계(陶溪) ·손곡(損谷). 시호 문헌(文憲). 판서 시환(始煥)의 아들. 13세 때 《금수정기(金水亭記)》를 지어 신동이라 하였다. 1723년(경종 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 사서가 되었다. 1727년(영조 3)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를 지내고, 이어 대사간 ·승지 ·대사성을 거쳐 1744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판서 ·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낸 뒤, 1755년 이조판서에 올랐다. 소장(疏章)을 잘 지어 문명을 떨쳤다.

 

                     함양동헌 모란   咸陽東軒 牧丹

 

                                             노송당(老松堂) 송희경(宋希璟)

 

雨餘風日轉淸酣   비온 뒤의 바람과 해는 더욱 해맑아

金縷紅衣映碧衫   금빛 실 붉은 옷 푸른 적삼에 비치고

京洛尋春豪俠貴   서울 지역 봄놀이 부귀 가문 자제들

那知國色在天南   어찌 국색이 남방에 있는 줄 알리오

 

                     함양동헌 대나무   咸陽東軒 竹

 

                                             노송당(老松堂) 송희경(宋希璟)

 

含風沐雨又和烟   바람 맞고 비에 젖고 안개에 젖어

來對此君今四年   여기에 와 대나무 마주한 지 네 해

勁節亦能傲霜雪   굳은 절개 서리와 눈에도 꿋꿋하니

也宜移種玉階前   섬돌 앞에 옮겨 심는 것이 마땅해

 

원주: 만년에 부모가 연로하여 여러번 지방 봉양을 요청하여 이 고을에 와 지키게 되었다. 동헌이 협소하고 기울고 위태하여 관찰사가 오면 수행원과 수령이 앉는 차례로 어려워하였다. 을사년(홍희 1, 1425, 세종 7) 봄에 개축하고 단청하고 담장을 물려 쌓았다. 모란 두 그루를 심고 또 섬돌의 대나무를 배양하였다. 그리고 절구시 두 수를 지었다. 홍희을사 춘삼월.

晩年。以親老屢乞邑養。來守玆郡。東軒狹小傾危。使華巡至。則從官守令以坐次難焉。乙巳春。改構丹雘。退築垣墻。種牧丹二條。且培養階竹。而題二絶。洪煕乙巳 皇明仁宗年號 春三月日。<老松先生日本行錄, 咸陽東軒壁上韻 邑號天嶺>

 

                        청향당   偶得十絶。錄似伯雲太守行軒 其四首

 

                                     뢰계(뢰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五馬春風皁蓋飜   태수의 봄바람 검은 일산 펄럭이니

定知爲政主平反   어진 정치 억울함을 풀어줌 알겠네

淸香堂上淸香意   청향당 위의 청향(맑은 향기)의 뜻

說共梅谿道已存   매계와 함께 도는 이미 존재한다네

 

역주: 녹운태수는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함양군수로 부임한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이다. 청향당은 객관 서쪽에 있으며 밑에 연못이 있다. 군수 조위(曺偉)가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양군>

 

                        차운하여 종이를 선물한 동년(同年:문과 급제 동기)  함양 수령 이항무(李恒茂)에게 사례하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一封書至自南州 남쪽에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오니

尙想蓴鱸物外秋 순채와 농어가 생각나는 시절이네

老去宦途詩摠廢 벼슬길에 늙어가며 시짓기 폐지나

今朝喜與楮生遊 오늘 아침엔 종이와 기쁘게 논다네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낸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간행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

 

     1. 남몽뢰(1620-1681)가 지은 『구소수간초선』의 발문

 

  이상은 구양공(歐陽公:歐陽修)과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서간집이다. 누가 뽑아 엮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뽑은 것을 보면 가장 그 요체를 얻었다고 하겠다. 대개 그 작은 편지의 간요하면서도 또 간요한 것을 취한 것이다.

  내가 옛날 서울에 있으면서 이 책을 친구 집에서 빌려 보다 다 읽지 못한 상태에서 책 주인이 독촉해 돌려주었으므로 늘 한스러워하였다.

  신해년(1671,현종12) 가을에 나의 벗 진사 정홍현(鄭弘鉉 1621-?)이 나를 함양 임소로 찾아와 이 책을 소매 속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완연히 옛 상태 그대로여서 완상하여 마지 않았고 책 상자 속에 간직하며 관심을 놓지 못하였다. 동호인들과 함께 하고 싶어 널리 전할 길을 도모하였지만 또 그 힘이 미치지 못함을 한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마침 『양촌문집 陽村文集』 중간 역사가 있었으므로 인하여 각수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

  구양공 편지는 모두 47 편(문집 9;21에는 49편이라 함)이고 소동파 편지는 모두 95 편이니 합계 142 편(문집에는 144편이라 함)이다. 어떤이가 그것이 너무 적다고 탓하므로 내가 응수하기를 "어찌 많은 것을 추구하겠는가. 절조(折俎:조각구이)가 비록 체천(體薦:통구이)에 미치지 못하나 사금도 반드시 모래를 이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문단의 .일례이니 어찌 많은 것을 추구하겠는가." 하니 어떤이가 내 말을 그렇다고 여기며 나로 하여금 그 전말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 사이에 감히 평론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갑인년(1674,현종15) 3 월 초하루 영양(英陽) 남몽뢰는 적다.

 

     2. 남몽뢰의 생애와 저술

 

  이계(伊溪) 남몽뢰는 자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 본관은 영양으로 저서에 『이계집 伊溪集』과 『이계속집 伊溪續集』이 있다. 광해군 12 년(1620)에 의성군에서 태어나 숙종 7 년 (1681)에 별세하였다. 이계는 23 세 때인 인조 20 년(164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2 세 때인 효종 2 년(1651)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52 세 때인 현종 12 년(1671) 4 월에 함양군수로 부임하고 흉년으로 아사하는 유민들을 진휼하여 이듬해 봄에 구황 치적 제일로 준직(準職)의 명을 받았다. 준직이란 품계에 해당하는 직책을 가리킨다. 54 세 때인 현종 14 년(1673) 2 월에 진주목사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구소수간초선』을 간행하고 발문을 지었다. 숙종 1 년(1675) 겨울에 병을 이유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인이 몰락한 경신환국(1680,숙종6) 3 월 61 세 때 의금부에 하옥되고 이듬해 겨울에 전남 고흥군에 귀양갔다가 열흘 만에 다시 압송되어 11 월 15 일에 남원시에 이르러 별세하였다. 관이 함양을 지날 때 선정비를 세웠던 함양 주민들이 남녀노소 없이 통곡하였고 상여 줄을 잡는 이도 있고 제사를 지내는 이도 있었다.

  이계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구소수간초선』을 전해준 정홍현(1621-?)은 『사마방목 司馬榜目』에 보면 인조 26 년(164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자는 원길(元吉), 본관은 동래, 성주군에 살았다. 이계는 함양에 있으며 흉년을 구제하느라 이 책을 간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계는 함양군수로 부임한 뒤 그 1 년전(1670,현종11)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대전시 동구 중리동의 유형문화재 송애당(松崖堂) 주인으로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동문인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 1596-1653)의 아들인 김진수(金震粹 자는 晦叔)와 초면으로 친해져 자주 왕래하였다. 현종 13 년(1672) 5 월에 안음현 관아 밖 대숲 속에 관덕정(觀德亭)을 짓자 같이 활쏘기도 하며 그 기문을 짓기도 하였다. 그해 9 월에는 자기의 외삼촌인 권창업(權昌業 1600-1663)의 묘표를 우암선생에게 부탁하여 짓게 (송자대전 198권 번곡처사樊谷處士 권공창업묘표, 이계집 5권 처사권공묘광명墓壙銘) 하였고, 함양의 선비 양석번(梁錫蕃)이 춘와(春窩)란 서실을 짓자 그 기문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계집』은 6권 3책, 목판본으로 증손 남성천(南聖天) 등에 의하여 정조 2 년(1778)에 간행되었고, 『이계속집』은 3권 2책, 목판본으로 10세손 남우룡(南佑龍) 등에 의하여 1937 년에 경북 의성군 점곡면 윤암동에 있는 이계의 유적지인 이계당(伊溪堂)에서 간행되었다. 다만 이 문집에는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교류한 사적은 기재하지 않았다.

 

     3. 함양군수 남몽뢰에게 보낸 우암선생의 답신 --임자(1672,현종13) 9월 10일

 

  권처사(權處士 명은 昌業)의 묘표는 당시에 매우 참람한 짓인 줄 알면서도 또한 감히 부탁하신 정중한 뜻을 저버리지 못하여 억지로 초하여 바쳐서 취사 선택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하교하신 뜻을 받드니 칭찬이 실제에 지나치고 표현이 너무도 겸손하기에 내 자신 부끄럽고 송구함이 더욱 더하여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인하여 잘못을 지적하며 새로 고치도록 하시니 또 어진 군자의 두터운 마음씀을 볼 수 있었는바 일자지사(一字之師)일 뿐만이 아닙니다. 깊이 명심하여 다시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삼가 분부에 따라 개정하겠습니다. 그밖에 고친 것도 여러곳입니다.

  대개 당시에 바쁘고 어지러워 전혀 자세히 못하였습니다. 『소학 小學』 선행편(善行篇)에서 장관(張觀)이 말한 "바삐 하면 그릇된다"는 경계를 가슴에 새기지 않아서입니다. 송구합니다. 묘표의 초본은 행장과 함께 반납합니다. 그 초본은 뒤에 안음현감 편에 도로 보내주시거나 따로 한 본을 베끼어 돌려주셔도 좋겠습니다. 대개 집에 초고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집 애들이 구하고자 해서입니다.

 

      4. 『구소수간』에 얽힌 이야기

 

  『구소수간 歐蘇手簡』은 세종대왕이 세자 시절에 많이 읽은 책이다. 세종이 책을 좋아해서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책을 열심히 읽자 태종은 명을 내려 책을 전부 치워버리게 했다. 그런데 『구소수간』이 우연히 책상 옆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세종은 이 책을 1천 번이나 읽었다는 것이다. 『명종실록』에 이 일화가 실려 있다. 이 『구소수간』은 임진왜란 이전에 청주, 홍주, 곡산, 예천 등지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서울대 등에 남아 있는데 4 권 1 책이고 분량은 78 장이다. 그런데 남몽뢰가 간행한 책은 같은 목판본이라도 불분권이고 50 장이며 간(簡)자도 간(柬)으로 되어 있고 초선(抄選)한 것이니 원본에서 뽑아 엮은 것인데 남몽뢰도 초선자를 알지 못하였다. 산기 이겸로 저 『통문관책방비화』 참조. 산기선생은 임란 이전본과 현종 진주간본을 언급했는데 이 외에도 다른 판본이 있다.

  무신년(1908?)에 활인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은 부계 예씨(芮氏)들이 간행한 것이다. 옥주(沃州:옥천)에서 『구소수간』 사본을 예병기(芮丙基)가 구해오자 예대훈(芮大塤)이 인행하고 예대희(芮大僖)가 발문을 지었다. 이 발문에선 세종대왕이 이 책을 만 번을 읽었다고 하였다. 예대훈이 약간 편집을 가하였다. 일본에서도 『구소수간 歐蘇手簡』이 간행되었다. 1780 년의 축상(竺常) 서문본은 4 권 1 책으로  두인걸(杜仁傑)의 원서가 있다. 1797 년에는 일본의 송본유헌(松本幼憲)이 후편을 엮어 경조(京兆)의 방각본 서사(書肆)인 임권병위(林權兵衛)가 간행하였는데 또 축상이 서문을 지었다. 이 2 책이 한 질이 된다. 한국에서 임란 이후에 유행한 『구소수간초선』은 함양군수 시절에 구해놓고 간행하려다 못한 남몽뢰가 진주목사로 전임한 뒤 간행한 것이니, 함양과 인연이 깊은 책이라고 하겠다.

 

                            함양향교   咸陽鄕校 金安國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金公治化鄭公鄕   점필재의 다스림에 일두의 고장

庠塾薰風盡善良   학교의 훈풍이 다 선량하구나

小學工夫須更勉   소학 공부를 모름지기 힘쓸지니

兩賢遺範詎宜忘   두 현인의 끼친 모범 어찌 잊으랴

 

                           신약당   神藥堂  

 

                                            김윤수 작, 역

 

신의망재삼남당   神醫忙在叔男堂   신의는 삼남의 가택에서 바쁘게 살며

일대백인수신방   日處百名神藥方   날마다 수백 명의 환자에게 처방하네

불출호지천하병   不出戶知天下病   문밖을 안 나가도 천하가 병든 것 알아

활인구세익창황   活人救世益倉皇   활인 구세의 마음 더욱 급하기만 하네

 

신약당 함양군 함양읍 용평리 사리장산업발상지 인산선생삼남가택, 인산죽염촌(주), 인산주식회사, 인산의철학, 인산한의원

 

                                   고대가 지은 부음정(孚飮亭) 헌수시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추만계산모경농 秋滿溪山暮景濃   가을은 산천에 가득 풍경 멋들어진데

암암앙기엄추용 巖巖仰企儼秋容   고고하고 고결한 존안을 우러러 뵈네

일배경축천년수 一盃更祝千年壽   한 잔 술로써 천년 장수 축수하오니

여해여송우화숭 如海如松又華嵩   바다 같고 소나무 같고 오악 같으시라

 

역주: <내암집>에 있다. 부음정은 내암 정인홍(남명의 수제자)의 정자이다.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에 있다. 고대 정경운은 옥계 노진의 향선생 당곡 정희보의 손자로서 내암의 함양 출신 수제자이다. 함양읍 위천에 소고대가 있는데 그를 취하여 호를 삼았고 내 건너 돌북에 살았다. 묘소는 난평리 신기마을에 있고 자손은 수동면 목현에 산다. 그의 임진왜란 전후의 일기인 <고대일록>은 당대사의 중요한 사료이다.

 

                                  백사정    白沙亭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1357~1417)

 

尋春載酒過孤村   봄 찾아 술 싣고 외딴 마을 지나니

布穀聲中晝掩門   뻐꾸기 소리 대낮에 사립 닫혀있네

雨後殘花浮水出   비온 뒤 낙화가 물에 떠 흘러오니

人間無處不桃源   인간 세계 무릉도원 아닌 곳 없네

 

                           서계창수   西溪唱酬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1521∼1591)

 

喜到西溪上   기쁘게 서계 위에 이르러

重尋物外眞   거듭 세상 밖의 참을 찾네

儒酸行色淡   궁한 선비라 행색이 담백하고

巖古水聲新   예스런 바위에 물소리 새롭네

僧渡澗頭棧   승려는 냇가 널다리를 건너고

鳥啼山暮春   새는 늦봄의 산에서 지저귀네   

崔仙佔畢興   최고운과 점필재의 흥취가

千載付吾人   천년 뒤 우리에게 전해졌네

 

정복현의 자는 수초(遂初)이고,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 1521년(중종 16년) 4월 18일에 아버지 신(愼)의 아들로 거창(居昌) 무등리(無等里) 죽곡(竹谷)에서 태어났다. 10세(1530년)에 함양의 대수촌(大樹村, 현 유림면 옥매리 매촌마을)에서 독서하였고, 13세(1533년)에 당곡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22세(1542년)에 덕천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며칠간 머무르면서 시서(詩書)를 강질(講質)하였다. 31세(1552년)에 강익, 노관(盧祼), 임희무, 박승임(朴承任) 등과 더불어 일두선생의 서원을 창립하였다. 41세(1561년)에는 마천동(馬川洞)에 운학정(雲鶴亭)을 지었다. 강익과 더불어 늘 상종하였고, 도의로 강마하였다.  

46세(1566년) 5월에는 강익, 노관, 양홍택, 김우굉, 김우옹 등과 남계서원에 모여 약속하고 함양 서계(함양읍 서쪽 구룡댐 아래 복골)를 유람하고 서계창수를 지었다. 53세(1573년)에는 뇌계(뢰溪) 위에 지은 제광당(霽光堂)에서 『주역』을 공부하였다. 1591년(선조 24년)에 세상을 떠난 후 1777년(정조 1년)에 거창의 영빈서원(瀯濱書院)에 배향되었다.

가정 병인 1566년(명종21) 함양군수 이계 김우홍 伊溪 金宇弘 1522-1590의 세 아우와 함양 인사 6인의 서계 유람 시집-서계창수록 명단

1. 직봉 김우옹 숙부 直峰 金宇顒 肅夫 1540-1603

2. 사암 노   관 자장 徙庵 盧   祼 子將 1522-1574

3. 매촌 정복현 수초 梅村 鄭復顯 遂初 1521-1591

4. 송암 강   익 중보 松庵 姜   翼 仲輔 1523-1567

5. 죽암 양홍택 호연 竹庵 梁弘澤 浩然

6. 개암 김우굉 경부 開巖 金宇宏 敬夫 1524-1590

7. 죽헌 정   지 중윤 竹軒 鄭   摯 仲尹

8. 매암 조   식 유청 梅庵 曺   湜 幼淸 1526-1572

9. 사계 김우용 정부 沙溪 金宇容 正夫 1538-1608

 

                                   덕봉사에서   題德峰寺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92.....1650)

 

불향소진불등미 佛香消盡佛燈微   향불도 사그라들고 등불도 어렴풋한데

장실소연진사희 丈室蕭然塵事稀   주지 방은 적막하니 속된 일도 드무네

투득소한성신숙 偸得小閒成信宿   잠시 틈을 내어 이틀 밤이나 묵고서

효종명후하산귀 曉鐘鳴後下山歸   새벽 종이 친 뒤 산을 내려 돌아가네

기암집 畸庵集 정홍명 鄭弘溟 1592.....1650 함양군수 1643.....1646

 

역주: 덕봉사는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덕봉에 있었다. 인조 21년 경에도 건재했었는데 이후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미상이다. 지금 축대와 추월당 학훈대사 秋月堂 學訓大師 등의 부도가 남아 있다.  (2006.12.26 함양문학 15호)                                   

 

제4경. 남계서원

 

                  남계서원   溪書院 咸陽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堂堂天嶺鄭公鄕   당당한 천령 고을 정선생의 고장

百世風傳永慕芳   백세 청풍 전하니 길이 사모하네

廟院尊崇眞不忝   서원에서 존숭함은 참으로 알맞으니

豈無豪傑應文王   어찌 문왕에 호응하는 호걸이 없으리

 

                   남계서원 참배   謁灆溪書院敬次退陶先生板上韻

 

                                          직재(直齋) 김익동(金翊東, 1793∼1861)

 

西來先問蠧翁鄕   서쪽으로 와 먼저 일두 고향을 찾아

灆水秋風採舊芳   남계천 가을 바람 옛 향기에 취하네

道學吾南誰所倡   도학은 우리 남방에서 누가 창도했나

高山千載仰天王   높은 산 천년토록 천왕봉을 우러르네

 

역주: 경산 구연정(대구대학교 캠퍼스 비호동산) 금호강변에 위치. 이 정자는 대구대학교 캠퍼스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시대인 1848년(헌종 14) 무렵 직재 김익동(1793∼1861)이 건립. 김익동은 1819년(순조 19) 진사시에 합격, 저서에 《직재문집》이 있다. 정자 뒤편 오른쪽 암벽 위에 1973년 옮겨 세운 김익동의 사당이 있다.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암벽 위에 북동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 경관이 매우 좋다.

 

                   청계정사   次靑溪精舍韻    

 

                                  연봉(蓮峯) 임병홍(林炳洪)

 

倡學東方澤及深 동방에서 학문을 창도하여 은택이 깊으니

兩賢遺範誦于今 두 현인의 끼친 모범 지금까지 칭송되네

同德同門同死義 덕도 같고 스승도 같고 죽음도 같은 의리

靑溪明月更相尋 맑은 시내와 밝은 달로 다시 서로 찾으이

 

                         숙야재에서 주역을 읽다   夙夜齋讀易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

 

燈下披黃卷   등불 아래 주역을 펼치니

分明古聖顔   옛 성인의 얼굴이 분명타

夜深開戶看   깊은 밤 방문을 열고 보니

雪月滿空山   눈빛 달빛 빈 산에 가득타

 

             강참봉 만사 姜參奉挽詞 명 익(翼) 자 중보(仲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의례삼천록 儀禮三千錄   십삼경 중의 <의례>를

심구오십년 尋究五十年   50년 동안 연구했네

극신간훼중 棘薪看훼重   부친은 돌아가셨고  (훼=火+毁)

훤초우상전 萱草又霜顚   모친은 연로하시네

야진제상조 夜盡啼商鳥   밤새도록 부엉이 울고

춘심규두견 春深叫杜鵑   봄 깊도록 두견새 우네

상천호부득 上天呼不得   하느님께 울부짖을 수도 없는데

군자과하건 君子果何愆   군자가 과연 무슨 허물이 있는가

 

*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은 함양군수동명 효리 출신으로 26세 때 숙야재(夙夜齋)를 짓고 강학하였다. 남명의 문인으로 별세 1년전에 남명을 모시고 안의삼동을 유람한 적이 있다. 일찍이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시는 남계서원을 주창하여 창건하였다. 남명보다 먼저 별세하여 선생이 제자의 만사를 쓰게 된 것인데 군자로 표현하며 극도의 슬픔을 표출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사랑을 깊이 받은 것이다. 묘소는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그 조부 금재(琴齋) 강한(姜漢)과 한곳에 있다.

 

                    일로당 제영 차운   逸老堂題詠步韻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

 

隱約華榱蔽樹陰   어슴푸레한 서까래 나무 그늘에 가리고

四知家世一邦欽   강직한 집안 전통 온 나라가 흠모하네

遺安肯負平生志   편안함을 물려줌 평소 뜻 저버림 아니고

食報聊償此日心   보답받는 것은 현재 마음을 보상함이네

共說枝繁由植厚   가지가 번성함은 뿌리가 튼튼해야 하고

會看流遠自源深   지류가 긴 것은 원천이 깊기 때문이네

從今衮衮于門慶   지금부터는 가문의 경사가 이어질지니

眉白兒郞振大音   준수한 자제가 큰 명성을 떨치고 있네

 

원제: 梁使君喜。示逸老堂題詠長律數首於余曰。堂卽吾先祖所搆。先祖屢典名郡。以廉愼褒擢堂上官。晩節休退。優游鄕里以終。其一詩乃吾先君所製。余受而讀之。不覺嘆想。謹步韻以呈。

양 사군 희가 일로당 제영 장률 몇 수를 내게 보이며 “당은 우리 선조가 세운 것입니다. 선조는 여러번 이름난 고을을 맡아 청렴과 근신으로 표창되어 당상관에 발탁되었습니다. 만년에는 물러나 쉬며 향리에서 소요하면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 시 한 수는 우리 선군께서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받아서 읽고서 부지불각중에 감탄하며 그리워하였다. 삼가 운을 따라 지어 바친다.

역주: 성종조의 청백리 일로당 양관이 살던 일로당 건물을 중심으로 남계 표연말, 춘당 박맹지, 일로당 양관, 금재 강한, 구졸암 양희, 우계 하맹보 6현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으니 현재 수동면 우명리 효리마을에 있는 구천서원이다.

 

                                            구졸재의 사위 처가살이 내암 정인홍

                      산해정(山海亭)에 있으며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 뒤어 써서 정군인홍에게 주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일생우락양번원 一生憂樂兩煩寃   일생 동안 근심과 즐거움이 답답하게 하나

뇌유전현위수번 賴有前賢爲竪幡   앞 현인들이 표준을 세운 것에 힘입어 사네

참각저서무학술 慙却著書無學術   책 쓰기는 학술이 없는 것이 부끄러워

강장금포우장언 强將襟抱寓長言   애오라지 회포를 엮어 시조에 부치네

 

원주: 병인년(명종21,1566) 가을에 선생이 김해 산해정에 계셨다. 인홍이 가서 모시고 반달을 머물렀다. 인홍이 북으로 귀환할 때 선생이 손수 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를 짓고 또 이 절구 1수를 지어 그 뒤에 써서 주었다.

역주: 정인홍(1535~1623)은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효리 삼괴당(三槐堂)에 살던 구졸재 양희(1515~1580)의 사위로 와서 살다가 합천 고향으로 돌아갔다. 처남인 서계 양홍주(1550~1610)와는 원수지간이 되어  같은 남명의 제자인 양홍주는 서인으로 귀순하여 함양을 떠났고(내암의 제자들이 집을 헐고 쫓아냈다) 선조 말년 상소하여 서로 비방전을 펼쳤다.

 

내암 정인홍이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인 11세 시절(1546,명종1) 지은 「영송(詠松)」

 

*소나무는 만11살인 ‘정인홍’ 자신을, 탑은 판결사(判決使)인 ‘양희(梁喜)’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 이 시로 인해 그 후 정인홍은 ‘양희’의 사위가 됨.

 

一尺孤松在塔西   한 자쯤 되는 외솔이 탑 서쪽에 서 있으니

塔高松短不相齊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 가지런하지 않네

莫言此日松低塔   오늘날 외솔이 탑보다 낮다고 말하지 마오

松長他時塔反低   소나무가 자란 뒤에는 탑이 도리어 낮으리

 

 역주: 이 시는 함양 효리 출신으로 구졸재 양희, 옥계 노진과 함께  천령삼걸(天嶺三傑)로 불린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이 8세 때 함양군 수동면 승안사(昇安寺, 현 일두선생묘소아래, 보물로 지정된 승안사지 삼층석탑이 있다.)에서 공부할 때 지은 시와 내용이 같다. 청련집 보유에 실려 있다.

 

                         탑 솔   塔松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

 

一尺靑松塔畔栽   한 자쯤 푸른 외솔이 탑 가에 심겨 있으니

塔高松短不相齊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 가지런하지 않네

傍人莫怪靑松短   사람들아 푸른 솔이 낮다고 괴이쩍어 마오

他日松高塔反低   뒷날 솔이 자란 뒤에는 탑이 도리어 낮으리

 

역주: 청련은 모친 나주임씨의 친정인 수동면 우명리에서 태어나 자랐고 부친과 모친의 산소도 다 우명리에 있다. 조모의 친정인 강진에 16세 때부터 기거하였다.

 

                        대고대 친족 모임   題大孤臺族會      

 

                                          송탄(松灘) 정홍서(鄭弘緖, 1571-1648)

 

百尺孤臺一望通   백척 높이 대고대 한눈에 트이니

登臨景像浩無窮   올라 바라보는 경치 아득하구나

半天霞鶩夕陽外   저녁 노을에 중천을 나는 따오기떼

十里湖山秋影中   가을 그림자 속 십리 산천의 풍경

酒席歡情兄及弟   술자리 즐거운 정 나누는 형과 아우

門欄勝事畵難工   집안의 좋은 일 그림 그리기 어렵지

逢場莫浪催歸騎   이 마당에 함부로 돌아가길 재촉치 말게

直待更深月出東   야반삼경 달이 동쪽에 뜨기를 기다리리

 

송탄집 松灘集 1:26 정홍서 鄭弘緖 1571-1648

 

                          대고대의 바위 수난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 1877. 2.10~1963.10. 3)

 

 대고대(大孤臺)는 천령군 동쪽 20리에 있다. 큰 바위가 들 가운데 깎아지른 듯이 솟았고 우뚝 축대를 이루었으니 또한 하늘이 만든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안의에서 물에 떠내려 왔기 때문에 부래암(浮來巖)이라고도 한다.

 옛날 옥계(玉溪) 노문효공(盧文孝公:禛 1518-1578)이 비로소 대고대라고 명명하였다. 수백 년 이래로 한 고을의 유림들의 공공 유람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감히 정자를 짓거나 성명을 새기는 자가 없었으니 대개 사리상 의당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근세에 은산현감(殷山縣監)을 지낸 개은(介隱) 정재기(鄭在箕:1811-1879)가 갑자기 대고대(大高臺)라고 개각했지만 오히려 이름은 새기지 않았다.

 이래로 지적법이 시행되어 대고대 땅은 함양군 공립 보통학교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옆에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1515-1580)의 신도비각이 있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옛날부터 으레 양씨의 소유로 알았다.

 연전에 군수 민인호(閔麟鎬)가 이 대에 가서 논 적이 있었는데 양씨로서 모인 사람이 몇 되었다. 민군수가 이르기를,

 “이미 선생의 비각이 있으니 대 암면에 어찌 구졸 양선생 장구소(杖屨所:산보, 소요하던 곳) 8자를 새겨서 존모하는 뜻을 표하지 않는가?”

하자, 양씨들이 참으로 미처 할 겨를이 없었다고 답하였다. 며칠 뒤 협의하여 위 8자를 크게 새기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은산현감의 증손 정근상(鄭近相)이 그 말을 듣고 학교와 교섭하여 대의 부근에 있는 자기의 전토 몇 마지기와 서로 바꾸어 드디어 소유권을 얻었다.

 올해(1924) 봄에 대의 등성이에 정자(淸近亭) 한 채를 지었는데 비각을 직접 누르고 내려다보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양씨들은 한 사람도 와서 보고 그 불가함을 말한 자가 없었다.

 정근상이 낙성연을 열어 주육을 크게 장만하고 기생과 풍악을 베푸니 그날 모인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이에 계를 맺자는 논의가 일었지만 명칭은 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즉시 계안(契案)에 가입한 사람이 4백여 명이었다. 양씨 중에서도 잔치에 참여하여 계에 든 사람이 있었다.

 정근상이 또 원근 인사의 성명 새김을 개방하여 대의 암면은 한 조각 빈곳도 없이 휘황찬란하게 성명이 새겨졌다. 대개 대가 자기 소유임을 표시하고 자기 증조 은산공을 위해 계를 맺고자 함이었다.

 드디어 대 암면의 구졸 양선생 장구소 8자를 깎아내고 자기 이름을 새겼다. 고을 사람들 중엔 사사로이 불가하다고 여기면서도 감히 그 잘못을 분명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오직 박문재(朴文在) 군만이 공론을 채집하여 충고를 표하여 정씨 문중에 서신을 보냈는데 그중에 “어찌 박절한가.”란 말이 있었다.

 정근상이 대단히 뉘우치고 깨달아 여러 종족과 상의하고 다시 구졸암의 시를 깎아낸 곳에 새기어 전의 허물을 속죄하고자 하였는데 호응하는 고을 사람이 없어 실현하지 못하였다. 후에 천령제선현장구소 (天嶺諸先賢杖屨所) 8자를 새겨서 중론을 방지하였다.

 

 ※ 윗 글은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1877-1961)의 《추범문원외집(秋帆文苑外集)》 제4권에 있는 <기대고대사실갑자(記大孤臺事實甲子)>를 번역한 것이다. 성종 2년(1471)부터 6년(1475)까지 함양군수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시에 “조각구름 대고대에 날아가네.(斷雲飛過大孤臺)”라고 하였으니, 옥계가 처음 명명한 것은 아니다. 구졸암 양희의 시에서도 “시험삼아 대고대 위에서 바라보니(試向大孤臺上望)”이라고 읊어 대고대에서 소요하며 시를 읊조린 자취를 엿볼 수 있다. (함양문화 5집, 1997.12.30)

 서산 군수(瑞山郡守)를 지내고 정여창의 13대 종손인 개은(介隱) 정재기[鄭在箕 (1811-1879)]가 고종 8년(1871)에 만귀정(晩歸亭)을 세우고 기문을 손수 지었다. 고종 13년(1876)에 경상남도 함양 군수 이상선(李象先)이 개은을 방문하고 만귀정서(晩歸亭序)를 지어 주었고 개은이 돌아가신 몇해 뒤 고종 19년(1882)에 개은의 아들 정직현(鄭直鉉)이 추모기를 지었다. 정자 앞에 연못과 앞 옥계천(玉溪川)에 개평 폭포 및 개은이 명명한 풍호암(風乎岩), 욕호담(浴乎潭), 송석대(松石臺) 위에 송석정(松石亭)이 있고 동편 대숲에는 금소단(琴嘯壇)과 농월대(弄月臺)가 있다. 만귀정의 액호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나 유실을 우려하여 개은공의 후손이 별도 소장하고 있다. 《문화재도록》

 

 망북정(望北亭)의 남계(藍溪) 임희무(林希茂, 1527년1577년)

 

                        욕  천 浴 川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全身四十年前累 온몸에 40년 동안 찌든 때를

千斛淸淵洗盡休 천섬 맑은 물로 씻어 버리고 말리

塵土倘能生五內 만약에 먼지가 뱃속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 곧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

원주: 기유년(1549) 8월 초에 우연히 감악산(紺岳山) 아래서 놀았다. 함양 문사 임희무(林希茂 1527-1577)와 박승원(朴承元)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모시고 같이 목욕하였다.

역주: 옛 삼가현 지금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에 포연대(鋪淵臺)가 있고 그 아래가 남명이 목욕하며 욕천 시를 지은 곳이다. 이 시는 남명의 몸을 깨끗이하는 고고하고 고결한 선비의 기상을 여실히 잘 묘사한 걸작이다.

남계 임희무는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사근산성 기슭에 망북정을 짓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소요하였다. 그 묘소는 유림면 대궁리 재궁에 있다.

박승원은 반남 박씨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진극인 만장 진은 본래 천령 사람인데 김해에 장가들어 살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천령미미수로허 天嶺迷迷首露墟   천령에서는 수로왕의 터전이 아득하니

부증생식유신어 不曾生識有神魚   태어났을 땐 신어산이 있는지 몰랐겠지

부운무계창창면 浮雲無繫蒼蒼面   뜬 구름은 푸른 하늘에 매이지 않으니

수도군금환불여 誰道君今還不如   그대가 지금 도리어 못하다고 누가 말하는가

 

역주: 전구에서 뜬구름은 허무의 존재가 아니고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된 것이다. 결구에서 작자는 진극인의 요절을 남들처럼 불행하다고 본 것이 아니라 뜬구름보다 더 자유로운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시를 지을 때 남명의 심정은 뭔가에 매여 답답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가야의 고도 김해에 신어산이 있는데 신어산 자락에 남명이 처가에서 살 때 지어 거처한 산해정이 있고 산해정을 중심으로 남명을 모시는 신산서원이 있다. 진극인은 여흥진씨로 묘소는 함양군 유림면 대궁리에 있다.

 

                     연봉음    蓮峯吟

 

                                   연봉(蓮峯) 임병홍(林炳洪)

 

蓮花一朶作高峯   연화산 한 줄기가 높은 봉우리 되어

特立亭亭不世容   우뚝하게 서서 그 모습 범상치 않네

藏樹幽禽和底韻   나뭇 속 새는 어느 소리에 화답하나

耕雲稚犢務玆農   밭 가는 송아지는 농사에 힘쓰는구나

淸因泉石漫爲癖   맑은 샘물 수석 취미 고질이 되어

老去形骸信在笻   늙다리 몸뚱아리 지팡이에 맡기네

晩來漸得漁樵樂   늙으막 나무하고 낚시하는 낙을 알아

溪友山翁日與從   날마다 냇가 벗과 산 촌로랑 상종하네

 

                              사근산성   沙斤山城

 

                                             뢰계(뢰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沙斤城畔起陰雲   사근산성 가에 먹구름이 이니

坤靈夜泣雨紛紛   땅 신령 밤에 울어 비는 죽죽

庚申萬鬼啾啾哭   경신왜란의 온갖 귀신 곡소리

似恨當時張使君   당시의 장사또를 원망하는 듯

 

역주: 미타산(彌陀山, 현재 연화산)은 사근역(沙斤驛)의 주산(主山)이다. 산 위에는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2천 7백 96척(尺)이며 성 안에는 연못이 세 군데 있는데 가뭄이 들면 그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고려(高麗) 신우(辛禑) 6년(1380) 경신에 왜놈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삼도(三道)를 노략질하되 상주부(尙州府)의 창고를 불지르고 경산(京山)을 거쳐 사근역(沙斤驛)에 주둔했다. 삼도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왜(倭)와 사근역의 동쪽 3리(里)쯤에서 싸우다가 패(敗)하여 박수경(朴修敬)과 배언(裵諺) 두 원수(元帥)가 전사하였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이 5백여 명이나 되어 냇물이 다 붉었으므로 지금까지도 피내[血溪]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싫어서 국계(菊溪)라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때에 감무(監務)였던 장군철(張群哲)이 산성(山城)을 지키다가 왜적에게 도륙당한 바 되었으므로, 왜적이 그로 인하여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산성이 허물어졌으나 수리하지 않았는데 성종조(成宗朝)에서 다시 쌓았고 지금까지 다시는 수리하지 않았다. <국역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 상 寒竹堂涉筆上>

 

                사근역 수수정   沙驛雜述。次金元博韻寄贈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 1710.4.26~1760.8.15)

 

沙城春酒醉無醒   사근산성 봄술에 곤드레 되어

午夢偏長數樹亭   수수정에서 낮잠을 실컷 자네

多愧微官難報國   미관말직으로 충성 못함이 부끄러우니

三年不解馬醫經   삼년 지나도 마의경을 터득하지 못했네

 

수수정: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이 사근역 찰방이 되었을 때에 설치(設置)한 것이 많고 마음가짐을 공명하고 염직(廉直)하게 하여 관리들을 단속하였다.

내가 늙은 아전에게 50~60년 내려오는 동안 어떤 관원이 가장 훌륭하게 다스렸느냐고 물으니 그 아전이 능호라고 대답하였다.

대개 서화(書畫)와 문사(文詞)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의가 사무(事務)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으니, 미전(米顚 미불(米芾)의 별칭)과 예오(倪傲)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능호는 이치(吏治)를 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아의 동헌에 건 한죽당(寒竹堂)이라는 편액을 대전(大篆)으로 팠는데 자못 강하고 굳세게 보였다. 마루 동쪽 모퉁이에 두충(杜沖)ㆍ홍매(紅梅)와 고송(古松)ㆍ수죽(脩竹) 등속이 심겨져 있으며, 능호가 조그마한 기와 정자를 나무 사이에 세웠는데 동쪽으로 하당(荷塘)을 내려다보아 소연(蕭然)한 풍치가 있으며, 그 정자에 걸린 수수정(數樹亭) 세 글자의 편액은 문의 현령(文義縣令) 송문흠(宋文欽)이 쓴 팔분체(八分體)였다.

그리고 북쪽 기둥에는 능호의 자서(自書)를 걸었는데 글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거만한 관리가 아니었는데/古人非倣吏

스스로 세상 경영하는 사무를 빠뜨렸네/自闕經世務

우연히 하나의 미관에 기탁되어/偶寄一微官

두어 그루 나무 아래 거닐고 있네/婆娑數株樹

마힐(摩詰 왕유(王維)의 자) 시의 뜻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숭정(崇禎) 기사년(인조 7, 1629) 늦봄에 쓴다.(崇禎再己巳季春書)

<국역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상 寒竹堂涉筆上>

* 숭정 기사년은 인조 7년(1629)이 아니고 영조 25년(1749)이다.

 

                월명총   月明塚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塚上靑靑連理枝   무덤 위에는 푸르고 푸른 연리지

行人爲唱華山畿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 부르네

如今月白狐狸嘯   지금처럼 달 밝으면 여우 우는데

應是春魂化蝶飛   꽃다운 넋은 나비가 되어 날겠지

역주: 화산기 : 악부(樂府) 가곡(歌曲)의 이름이다. 송 소제(宋少帝) 때에 한 선비가 화산기로부터 운양(雲陽)을 가다가 여관에서 약 18∼19세쯤 된 여인을 보고는 좋아하여 마침내 심질(心疾)을 얻어 죽게 되자, 자기 모친에게 유언하기를 “나를 장사지낼 적에 화산을 경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친이 그의 말대로 관(棺)을 싣고 화산을 들러 그 여인의 문앞에 이르자, 말이 더 이상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이 목욕하고 단장한 다음, 문을 나와서 노래하기를 “화산기여, 그대는 이미 나를 위해 죽었으니, 혼자 살아서 누구를 위하랴. 예뻐할 때처럼 좋아한다면, 관목이 나를 위해 열려다오[華山畿 君旣爲儂死 獨活爲誰施 歡若見憐時 棺木爲儂開]” 하니, 관목이 열리자 그 여인이 관 속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그 선비와 합장하여 이를 신녀총(神女冢)이라 부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월명총

 

                            뢰계(뢰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月明塚上但明月   월명총 위에는 밝은 달만 떠 있고

寒食年年宿草多   해마다 한식날에는 풀만 우거졌네

昨夜遊魂瓊佩冷   어젯밤 떠돌던 혼의 패옥은 차운데

東風吹盡杜鵑花   봄바람 불어 진달래꽃 다 피어났네

 

                  월명총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1623)

 

금석정심마불린 金石貞心磨不磷   금석같이 곧은 마음 갈아도 닳지 않고

곡수이척사동분 穀雖貽戚死同墳   낭군이 근심 끼쳤으나 무덤은 같이 썼네

능교만고부윤기 能敎萬古扶倫紀   능히 만세에 윤리를 세우게 하였고

우향삼농작우운 又向三農作雨雲   농사철에는 비가 되어 내리기도 했네

 

태촌 원주 : "월명은 사근역 여인이다. 남편을 생각하다 병사하여 산꼭대기에 장사하였다. 가뭄이 드는 해에는 그 무덤의 흙을 무너뜨리면 비가 내린다."

 

 연민 이가원 선생이《조선문학사》에서 원문을 소개한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1553~1623)의 시를 살펴본다.《태촌집》제 1권에 칠언 절구 <월명총>과 <만덕총>이 실려 있는데 상호 반대되는 소재를 대비하여 지은 작품이다. <만덕총>은 뒤에 고찰하기로 하고 먼저 <월명총>을 본다.

 

이 시의 뜻을 살펴보면 월명의 정심貞心을 단단한 금석에 비유하고 승구承句는 살아 헤어졌지만 죽어서 한 무덤에 있게 된 사연을 묘사하고 전구轉句는 월명의 정열貞烈이 만고에 윤리의 귀감이 됨을 강조하였고 결구結句는 함양지역의 우신雨神이 된 새로운 양상을 표현하였다.

결구結句는 함양의 기우제 민속에 월명이 자리한,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는 역사 자료이다. 월명을 읖은 최초의 시인 점필재는 가뭄이 들면 함양군 휴천면에 있는 용유담龍游潭의 성모묘聖母廟에서 기우제를 지내곤 하였는데 조선 후기 태촌 시대에는 월명이 영험 있는 비의 신이 되어 있었으니, 전승 과정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무덤의 흙을 훼손해야 비가 내리니, 계속 훼손하면 무덤은 사라질 것인바 어떻게 기우제를 지낼 수 있겠는가. 훼손하기 위해선 복구해야 하리니, 무덤에 대한 계속적인 관심과 보수 유지를 위한 영적 작용일 것이리라.

태촌은 선조 34년(1601)에서 37년(1604)까지 함양군수를 역임하여 보고 듣고 체험하고 관심을 기울여 시로 읊고 수필로 기록을 남겼다.《태촌집》제 5권에 있는《효빈잡록 效嚬雜錄》하〈여화餘話〉에 더 자세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옛사람이 망부석을 읊은 시에 '산머리에 날마다 바람 불고 비 내리니 행인이 돌아오면 돌이 응당 말을 하리.' 라고 하였다. 풀이하는 자가 '망부석에는 저녁마다 바람 불지 않으면 비가 온다. 시의 뜻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천령天嶺(함양의 고호)에 부임하고서 두 번씩이나 월명총을 무너뜨리고 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옛사람의 시는 대개 허경虛境이 없음을 알았다. 월명은 사근역 여인이다. 서울 장사치에게 시집가기로 하고 혼례를 치렀다. 오래지 않아 장사치는 이익을 위해 상경하였다. 여인은 남편을 생각하여 마지않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병이 이미 위중해진 뒤 그 남편에게 편지하니 남편이 듣고서 배를 품고 천리길을 달려 내려왔다. 도착되기 전에 여인은 병이 위독해졌다. 임종시에 그 부모에게 부탁하기를 '서산의 꼭대기에 나를 묻어 주세요. 죽어서도 의식이 있다면 남편이 돌아오는 길을 바라볼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모가 불쌍히 여겨서 그 말대로 장사하였다. 장사지내는 날에 장사치가 비로소 왔는데 또한 애달파하더니 죽었다. 같은 무덤에 장사하였다. 장사지낸 뒤에 배나무가 무덤위에 생겨났으니 곧 가슴에 품고 온 배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나무는 늙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함양군에 있은 지 모두 4년이었는데 두 번이나 가뭄이 들었다. 원로들이 월명총을 파면 비가 온다고 하였다. 이른 바 판다는 것도 다 파는 것이 아니라 그 흙덩이 10여 개를 무너뜨리는 정도이다. 두 해에 흙을 팠더니 다 단비가 내렸다. 그렇다면 망부석의 비바람도 괴이한 것이 없겠다. 어떤이가 묻기를 '그렇다면 월명총은 어찌 날마다 비바람이 없는가.' 고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망부산의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월명의 남편은 죽어서 무덤을 같이 하였으니 원한에 있어서도 깊얕이가 있다. 비바람이 어찌 항상 있겠는가' 고 하였다. 어떤이가 위하여 시 한 구절을 읊었다." (이하 칠언절구 1수는 같은 것이므로 생략함.)  

선조 36년(1603) 경의 함양군수 태촌 시대와 성종 4년(1473) 경의 함양군수 점필재 시대는 140년의 격차가 나는데 설화는 더욱 다양해지고 상세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점필재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 월명총 기사와 비교하여 현저히 다르고 새로이 첨가된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동경상인東京商人이 경상京商으로 단순화되었고 둘째, 단순히 좋아하고 머문 것에서 정식 혼례를 치른 것으로 변모되었고 셋째, 장사치가 제발로 온 것에서 편지를 받고 온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넷째, 월명이 죽으면서 부탁한 유언이 기록되었고 다섯째, 남편이 돌아올 때 배를 갖고 왔고 그것이 묻히어 무덤에 배나무가 자라났으며 여섯째, 월명총의 흙을 조금 훼손하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과 영험이 생긴 것이다.

기록이란 시대가 흘러갈수록 증가되는 경우도 있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는데 월명 이야기의 기록이 증가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는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주제 남녀간의 애정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윤수.월명총과 만덕총.1998.12.01 함양문학 7호.>

 

                   만덕총   萬德塚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1623)

 

隨嫁隨亡過此生   시집가는 대로 죽어버려 이 삶을 보내니

九爲孀婦幾傷情   아홉 번 과부 되어 얼마나 상심했나

山腰十塚累累在   산허리에 열 무덤 나란히 놓여 있으니

地下千秋愧月明   천추 만세 지하에서 월명에게 부끄러우리

 

태촌 원주: 만덕도 사근역 여인이다. 아홉 번 시집갔으나 아홉 번 과부 되었다. 역의 호사자가 무덤을 연이어 장사지내 주었다. 만덕이 죽자 또 아홉 무덤의 아래에 장사지내 열 무덤이 구슬 목걸이처럼 연이었다. 월명총 아래에 있다. <김윤수.월명총과 만덕총.1998.12.01 함양문학 7호.>

 

제5경. 일두고택

 

                       일두고택   一蠹古宅

 

                                   김윤수 작, 역

 

東國名賢降介坪   동국의 명현이 개평에 탄생하여

打開理學孝忠幷   성리학을 열고 충효도 아울렀네

安貧樂道常居陋   안빈 낙도하여 옛집은 누추했으나

宗裔起家府邸宏   종손이 신축하여 저택이 우람하네

 

                          정일두 노옥계 집터 - 우담 정시한의 지리산과 덕유산 유람 - <산중일기>

 

 9월 9일 정일두선생과 노옥계 집터를 참관, 안음현을 지나 화림동 동구에 도착, 향교 앞 긴 다리를 건너 점풍루 등람, 심진동과 화림동의 큰 내가 합쳐지는 경계에 반하여 이사와 살고 싶어 함. 일두선생 유람처인 군자대(군자정) 도착, 신평 전좌수촌에서 말 먹이고 옥산창촌(玉山倉村) 김진추 집에 숙박.

10일 덕유산 영각사 도착, 저녁 후 절 뒤 2리 은경대암(隱鏡臺菴) 등람, 천순 수좌 방문, 아들 정항도 와서 같이 숙박, 암승은 일천(一天)과 선찬(善贊: 영각사 표석비<숙종10년,1684>에 보이는 선찬임)이다. 12일 강선암에 내려가다. 영각사 문을 지나 남현(남령)을 넘어 월성촌(月城村)에서 말 먹이고  농소막에 도착, 긴다리 건너 마정현 지나 옛 안음현 관창촌를 바라보고, 강남불촌의 가섭암에 숙박. 13일 3좌 가섭상을 참관. 14일 고현을 지나 올라가 수송대 유람, 다시 고현을 지나 거창읍에서 말 먹이고 가조현 문좌수 남로(文南老) 집에서 숙박. 이하 생략(1997년 9월 23일 화요일 우담전집에서 함산 초록)

 

                          신고당 노래   信古堂辭 咸陽盧生員友明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若有人兮遐之陬      먼 변방에 사람이 있어

聊逍遙兮相徉         소요하고 유유자적하다

佩蘭茝兮冠芙蓉      난초 허리띠에 연꽃 갓

蕙爲衣兮蓀爲裳      혜초 저고리에 창포 치마

朝飮兮在澗            아침에 산골 물을 마시고   

夕陟兮崇阿            저녁에 뒷동산에 오르다

云誰之思兮古之人   누구를 생각하나 옛사람이지

獨長吟兮行歌         홀로 읊조리며 노래하다

頭留碧兮揷天         두류산은 푸르고 하늘 높아라

雲煙變滅兮千萬秋   구름 안개 피고지고 천만년

思古人兮不可及      옛사람을 생각하나 미칠 수 없으니

空佇立兮悠悠         우두커니 서 있네 생각은 아득타

 

                                        남명이 옥계에게 회답한 서신

 

모는 여러 번 왕명을 받았으니 예의상 한번 궁궐에 나아가 사은해야 할 것이지만 도성에서 어정거린들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명공은 조만간 조정에 들어갈 것인데 만약에 도를 행하는 일이 없이 오래 머무르며 물러나지 않는다면 또한 구차히 녹봉을 탐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원주: 남명이 [명종 21년(1566) 10월에 상경하여 왕을 배알하고] 남쪽으로 돌아온 뒤 당시 함양 집에 물러나 있던 옥계가 서신을 보내 남명이 갑자기 돌아온 일에 대해 물으니 남명이 이리 답한 것이다.

 

                                       옥계의 남명 만장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의기횡성두 義氣橫星斗   의기는 북두성까지 뻗치고

심기도사요 心期到姒姚   마음은 요순 시절을 기약했네

잠영원폐사 簪纓元弊사   높은 벼슬은 원래 헌 신짝처럼 여기고 (사는 산발 사)

등대위청조 登對爲淸朝   임금을 배알한 것은 맑은 조정을 위해서네

사업당년몰 事業當年沒   업적은 당대에 사라졌으나

풍성백세요 風聲百歲遙   명성은 백대에 멀리 전해지리

옥전방장재 屋前方丈在   집 앞에 지리산이 있어

의구용운소 依舊聳雲   의구히 구름에 솟아 있네 (소=雨+肖)

 

 

신세원구학 身世元丘壑 일신은 원래 전원 취향이고

청풍일대흠 淸風一代欽 맑은 기풍은 한 시대에 존경받았네

상심경목가 傷心驚木稼 상고대 내린 것을 상심하고

합곡동유림 合哭動儒林 유림이 모여 애도하네

곡리수운월 谷裏愁雲月 골짝에는 구름과 달도 근심하고

상두위검금 床頭委劍琴 책상 머리에는 칼과 거문고만 남았네

종금살수로 從今薩水路 이제부터 덕천강 강변길

인거갱수심 人去更誰尋 사람은 떠났으니 다시 누구를 찾으리

  

                     추담정사(秋潭精舍)

 

                                     태천(苔泉) 민인백(閔仁伯, 1552~1626)

 

(전략)경진년(1580, 선조13)에 나는 비로소 함양에서 외가(모친이 盧禋의 딸) 선영을 참배하고 그 종친을 방문하고 또 남계서원 및 추담정사를 참배하였다. 추담은 노옥계진을, 남계는 정일두여창을 향사한다. 두 선생은 다 고을 사람으로 한 마을에서 제향받으니 더욱 성대한 일이다. 이어서 안음 영승동에 들어가니 임갈천훈(1500~1584)이 여기에 거처하여 나는 명함을 전했다. 곧 나와서 맞이하는데 나이는 80이 넘었는데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용모가 바르고 진중하며 말소리가 명랑하였으니, 참으로 속세 밖의 난새였다. 그 대문을 보니 붉은 정문이 나란한데 다 효자라고 칭하였다. 하나는 갈천이고 하나는 그 아우 운이다.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여주었다.(후략)

歲庚辰。余始拜外家先塋於咸陽。仍訪其宗黨。又拜濫溪書院及秋潭精舍。秋潭祀盧玉溪 禛。濫溪祀鄭一蠧 汝昌。兩先生皆郡人。而俎豆共同一里。尤盛事也。因入安陰迎勝洞。林葛川薰居于此。余投剌。卽出迎。年過稀耋。鬚眉皓白。儀容端重。語音明朗。眞物外鸞鶴也。見其門。丹旌雙列。俱稱孝子。一則葛川。一則其弟參奉芸也。殺鷄爲黍而供之。<苔泉集,遊賞,安陰迎勝洞>

 

춘수당 정수민의 천령지 天嶺誌 서문

 

 *邑之有志古也 고을에 읍지가 있는 것은 옛날부터이다. 嘗觀人事之强弱民風之淳요水+堯 일찍이 인간사의 강약과 민풍의 순수,투박함을 보건대 係於水土之淺深厚薄 수토의 천심과 후박에 매였더라. 俊乂之挺生 준걸이 태어나거나 財寶之興産 재물이 생산되는 것은 由乎地靈之亭植胚胎 땅 영기의 심거나 기름에 말미암는다. 至於館宇以待賓 관사로써 손을 대접하고 城池以禦侮 성으로써 침입을 막고 藪澤以利用 연못으로써 이용하고 關防以設固 요새로써 견고하게 지키니 邦家所永賴者 국가가 길이 의지하는 것이다. 而皆不可以不記 그러므로 다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則志之作夫豈得已乎 그렇다면 읍지의 찬술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國家輿地勝覽規模 나라의 여지승람의 규모는 一倣大明一統志爲之 한결같이 대명일통지를 본떠서 만들었다. 則三韓之鼎峙 그래서 삼국의 대치한 형세와 八路之碁布 팔도가 펼쳐진 형국과 百城之魚鱗 백여 개의 성벽이 줄지어 늘어선 형편을 可一閱而盡者 한번 보고서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今世家頗有之 지금 대갓집에는 상당히 가지고 있다. 而부衣+臼輯一邑之山川風土人傑物華 한 고을의 산천과 풍토와 인물과 물자 자료를 수집하여 別爲一帙 따로 한 질을 엮어 以便觀覽 관람에 편케 한 것으로는 若范石湖所纂吳郡志外 범석호가 엮은 오군지 외에는 鮮有作者焉 지은이가 드물다.

*從祖竊慨於斯而作天嶺志 종조가 이에 대해 은연히 개탄하고 천령지를 지었다. 天嶺吾鄕也 천령은 우리 고향이다. 以言乎名宦 명관을 말한다면 崔學士之偃仰風敎 최학사가 한거하며 풍교를 편 것이나 金점人+占畢之興學遺愛 김점필재가 학교를 일으키고 사랑을 끼친 것이 있고 以言乎形勝 형승을 말한다면 頭流磅박於前 지리산이 앞에서 웅장하고 뇌람經緯乎中 뇌계천과 남계천이 가운데에 종횡으로 흐르는 것이 있다. 禮俗之篤 예의 풍속이 독실한 것이나 土地之유月+臾 토지가 비옥한 것이나 物産之豊 물산이 풍부한 것이나 人材之富 인재가 많은 것이나 불冕之盛 벼슬아치가 풍성한 것은 在古蓋甲于嶺右矣 옛날에 있어 영남에서 으뜸이었다.

*自我先祖一두先生闡明性理爲斯文倡 우리 선조 일두선생께서 성리학을 천명하여 유교의 선구자가 되신 뒤로부터 繼而道德儒雅文章鉅公 이어서 도덕의 선비와 문장의 대가가 蔚然輩出 성대히 배출되었으니 則以文獻之邦 문헌의 고장으로 見推於一道 한 도에 추앙받은 것이 而尤莫有比肩者 더욱 비견할 곳이 없었다. 然而變亂之屢經 그러나 변란을 여러번 겪고 風氣之寢薄 풍기가 점점 박해져 陵夷至于今 점점 지금의 형세에 이르렀고 彷彿乎古昔者 옛날에 비슷한 것은 什無二三焉 열에 한둘도 없다. 所可徵者 고증할 수 있는 것은 山水之周遭 산수가 둘러 있는 것과 基址之流傳 터가 전해지는 것과 題詠之稱誦而已 시가 읊조려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從祖旣已涉其流而溯其源 종조가 이미 그 원류를 추구하고 參之古而驗之今 고금을 참고하여 網羅舊聞 옛 견문을 망라하고 搜剔遺事 빠진 일을 수집하였다. 其建置沿革標榜名目 그 건치 연혁과 표제 항목은 則不出勝覽大要 여지승람의 대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而於人物軌탁足+蜀 그러나 인물 자취에 대해서는 獨加詳焉 유독 더욱 상세히 하였다. 孝悌忠烈隱遁高趣 효제와 충렬과 은둔자의 고상한 취향에 대해서는 尤致謹而備錄之 더욱 삼가고 갖추 기록하였다. 以至一言一行一才一藝之在人耳目者 말 한 마디 행적 한 편, 재주와 기술 한 가지라도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는 것은 未不具載 다 기재하지 않은 법이 없었다. 盖非猝然朝夕之工夫 대개 갑작스런 하루아침의 공부가 아니니 而其用心亦勤矣 그 마음씀이 또한 부지런하였다.

*書始成 책이 비로소 이루어지매 藏之협사竹+司 상자 속에 간직하고 不欲以示人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지 않았다. 旣久不能隱 이미 오래되자 숨길 수 없어 稍爲人所取觀 점점 사람들이 빌려보게 되었다. 則終不敢自私 끝내 감히 스스로 사장하지 못하고 屬余序以弁其首 내게 서문을 부탁하여 그 첫머리에 놓게 하였다. 余謂志非待序以傳者 나는 천령지는 서문을 기다려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若夫從祖好古懷土之天性 종조의 옛날을 좋아하고 고향을 생각하는 천성과 尙賢嗜善之至誠 현인을 숭상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지성은 當於志觀 천령지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而非余序亦莫之發也 그러나 나의 서문이 아니라면 또한 밝힐 수 없을 것이다.

*從祖名秀民字子賓 종조의 이름은 수민, 자는 자빈이다. 旣老自謂東里居士云 이미 늙자 스스로 동리거사라고 하였다.

*時龍集丁酉 효종 8년 1657 仲秋旣望 8월 16일 河東後人鄭光淵 하동후인 정광연(호는 滄洲창주 1600-?) 書于羅村之百용心+庸軒 나촌(수동면 효리)의 백용헌에서 쓰다.

 

※ 천령지의 저자인 춘수당 春睡堂 정수민 鄭秀民 1577-1658 의 유적지로는 지금 수동면 우명리 일두선생묘소 입구에 춘수정 春睡亭과 경내에 벽사 이우성 교수가 지은 유적비가 있고 일두묘소 위쪽에 춘수당 산소와 묘비가 있다. 서문을 지은 창주 정광연은 일두선생의 현손인 송탄 정홍서 松灘 鄭弘緖 1571-1648 의 차남으로 그의 유적지로는 효리 입구에 구남정사 龜南精舍가 있는데 동실은 동봉재 東峰齋, 서실은 창주재 滄洲齋이다. 동봉은 창주의 손자인 충신 정희운 鄭熙運이다. 유림면 대궁리 감모재 앞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지은 창주의 묘비가 있다. (함양문학 8호, 1999.12.01)

 

              ᅠᅠ승안사 회고   承安寺懷古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3)

 

昔日承安寺   옛날의 승안사가

如今鄭氏山   지금은 정씨 산이네

滄桑千古事   상전 벽해 천고의 일

巢鶴出松間   학이 솔사이에서 나오네

 

역주: 승안사는 원래 昇安寺라고 표기한다. 수동면 사암산 자락에 있다. 일두선생묘 등과 여재각이 있다. 정씨 묘동이 된 뒤 폐사되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승안사지 삼층석탑과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일두선생묘소 제문   祭一蠧先生墓文 代作○甲辰(1724, 영조 1)

 

                                              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1693-1737)

 

惟先生東儒之作          선생님 동방 유학의 진흥에

功侔周程                   공적은 주렴계, 정자와 같고   

接一脉之淵源             한 줄기 유교 연원을 이어

啓諸賢之門庭             여러 현인의 문호를 열었습니다.

雖當時閼阨                당시에 액운을 당하여

身罹於魋倉之讒          간신배의 참소를 받았습니다.

而後世尊崇                그러나 후세에 존숭받아

血食於孔孟之次          공자, 맹자의 문묘에서 제향받습니다.

渺玆末學                   보잘것없는 저로서

猥忝郡寄                   외람되이 군수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寔下帷之舊鄕             공부하신 옛 고향이고

宛若堂之遺封             우람한 묘소가 있는 곳입니다.

惜不及揖讓于其間兮   그 사이에 학습하지 못함이 애석한데

曷慰余之欽顒             어찌 저의 흠모를 달랠 수 있겠습니까.

單杯薄羞                   한 잔 술과 변변치 못한 안주로

以代束脩兮                제자의 예물을 대신합니다.

洋洋在上者                양양히 하늘에 계신 혼이시여

想霽月與光風             광풍제월의 기상을 상상합니다.

 

조귀명(趙龜命) : 1693 ~ 1737. 자는 석여(錫汝), 보여(寶汝). 호는 동계(東谿), 또는 건천자(乾川子). 본관은 풍양(豊壤). 동춘당 송준길의 제자이며 상신(相臣)인 조상우(趙相愚)의 손자이며, 첨정(僉正) 태수(泰壽)의 아들.  경사(經史), 백가(百家)에 능하여 특히 노장(老莊)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사람됨이 청정하고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일찍이 참봉, 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조현명(趙顯命) 등 여러 종형제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조차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 후에 세자익위사 익위에 잠시 취임하였다. 그가 일찍이 탕평책을 주장한 인연으로 영조가 친히 포의의 신분이었던 그의 문집의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동계집(東谿集)』이 있다.

 

제6경. 연암실학촌

 

          연암실학촌

 

                  김윤수 작, 역

 

北學熱河日記成   북학파의 고전 열하일기 완성에

革新思想刮人睛   혁신사상이 사람들 안목을 새롭게 했네

荷風竹露諸堂   하풍죽로당 등 네 칸의 벽돌 건축

利用厚生安義名   이용후생의 실학 안의현이 유명하였네

 

역주: 연암이 안의현감에 부임하여 청나라에서 배운 벽돌 기술로 百尺梧桐閣, 烟湘閣, 荷風竹露堂, 孔雀舘 등의 건물을 지어 사용하였는데 1백여 년이 지나도록 찬연히 보존되다가 허물어졌고 1914년에 안의군이 폐지되면서 안의초등학교가 들어서 거기에 있던 관아 건물이 모두 사라졌다. 연암의 실학 정신을 기리고 실학적 건축물을 복원하여 연암연구 기지 겸 문화관광 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안의초교를 이건하고 옛 터전에 연암실학촌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의 해인사창수시서(海印寺唱酬詩序)  

 

경상도관찰사 겸 순찰사 이공 태영 사앙(李公 泰永 士昻)의 행차가 가야산에 들어 해인사에서 묵었다. 선산부사 이채 계량(李采 季良), 거창현령 김유 맹강(金유金+柔 孟剛) 및 지원이 영접하였다. (중략) 지원이 공에게 아뢰었다. 옛날 조남명이 지리산으로 돌아갈 때 보은으로 성대곡을 역방하였는데 그때에 성동주가 고을 수령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남명과는 초면이었는데 남명이 놀리기를 형은 '내구력 있는 관리라고 할 만합니다.' 하자 동주가 대곡을 가리키면서 웃으며 변명하기를 '바로 이 늙은이에게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년 8월 15일에 해인사에서 보름달을 기다릴 것인데 형은 올 수 있겠습니까.' 하자 남명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기일이 되어 남명이 소를 타고 약속에 맞춰 갔습니다. 도중에 큰비가 내려 가까스로 앞 시내를 건너 절 문에 들어가니 동주가 이미 누각 위에서 바야흐로 도롱이(띠로 엮은 비옷)를 벗고 있었습니다. 아, 남명은 처사이고 동주는 이미 벼슬을 떠난 처지였는데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민생의 질고이었습니다. 절의 중들이 지금까지 산중의 고사로 이야기합니다.

지원은 해마다 감사를 맞이하여 이 절에 들어왔는데 이미 세 분 관찰사를 겪었으니 또한 내구력 있는 관리라고 할 만하다. 달맞이 해후의 약속이 없으면서도 감히 심한 비바람을 피하지 못했고 매양 절 문에 들어올 때마다 약속하지 않고 모인 수령들이 늘 7~8 고을이었다. 절은 여관 같고 승려는 관기 같고 자리에 임해 시를 지으라 책하는 것은 장기판에서 독촉하는 것 같고 장막 친 것은 구름 같고 퉁소와 북은 새때소리처럼 울린다. 비록 단풍과 국화가 찬란하고 산천이 기이해도 또한 생민의 질고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한번 누각에 오를 때마다 미상불 서글피 옛 현인들의 도롱이를 멀리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이 것을 써서 산 절의 고사로 삼게 한다.

을묘년(1795, 정조 19) 9월 20일 안의현감 박지원 서.<연암집>

 

                       성천서원을 이건하고   星川書院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

 

輪奐新瞻起廟宮   크고 아름다운 사당이 새로 지워져

妥靈爭喜告成功   위패를 봉안하며 준공을 기뻐하네.

籩豆有踐明禋畢   제기를 진설하고 정갈한 제사를 마치니

衿佩分行縟禮同   유생들의 행렬은 성대한 예식과 같네.

門外高山兼活水   문밖에는 높은 산과 흐르는 물

夜來歌舞又和風   밤에 노래하고 춤추는데 산들바람 부네.

諸君矜式於焉在   제군들의 모범이 여기에 있으니

珍重斯文勉厥躬   신중히 유림들은 자신을 면려할지어다.

 

                    광풍루에 올라   登光風樓安義○一蠧鄭先生刱建尤庵宋先生撰記文

 

                                       사농와(士農窩) 하익범(河益範, 1767~1813)

 

光霽胷襟經濟憂   광풍제월의 흉금과 경세제민의 애민정신

兩賢精彩耀斯樓   두 현인의 정채로움 이 누각을 빛나게 하네

勝形不但東南最   형승은 동남방에서 최고일 뿐만 아니라

江漢秋陽我思悠   한강같은 맑음과 태양같은 밝음 그리웁구나

 

                            안음향교   安陰鄕校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淵源性理鄭先生   성리학에 연원한 일두 정선생

欽想當時政化成   당시 정치 교화가 이루어졌지

餘俗定應敦德行   남긴 풍속 응당 덕행이 도타워

須將小學益修明   소학 가지고 더욱 닦아 밝히라

 

                   용문서원 춘추 향축문   龍門書院春秋享祝文

 

                                   오적(吳勣, 1656생, 1681문과)

 

道光東夏   도는 동국에 빛나고

仁洽一邦   인은 일국에 넉넉하네

士林風動   사림들이 감화되니

百世不忘   백세토록 잊지 못하리

 

역주: 용문서원은 안의면 봉산리에 있었다. 성종25년(1494)에 문헌공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안음현감으로 선정을 베푼 것을 기념하여 선조 16년(1583)에 사당을 세우고 나중에 용문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선조 16년(1583)년에 갈천 임훈이 비문을 짓고, 석곡 성팽년이 글씨를 써서 세운 사당비가 지금도 옛터에 남아 경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제7경. 농월정

 

                 농월정   弄月亭

 

                              김윤수

 

安陰三洞八亭峨   안의삼동에는 여덟 정자 우뚝 솟고

白石月淵弄月波   흰 돌 달 못은 달빛 물결 희롱하네

知足南冥吟詠處   지족당과 남명이 시를 읊조리던 곳

仁山杖屨彩光多   인산이 소요하니 광채로움이 많네

 

                  농월정   弄月亭 知足堂 朴公 所築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1870~1946)

 

足翁亭子澗之幽   그윽한 시냇가에 지족당의 정자

曠世吾行爲暫留   희귀한 우리 여행길 잠시 머무네

月出金砂燦可數   달뜨니 금빛 모래 찬연히 세겠고

谷虛雲日遞相浮   골짜기 비니 구름 해 번갈아 뜨네

風光乍動紛盈目   풍광이 언뜻 이니 눈에 가득하고

塵土旋銷在轉頭   먼지는 고개 돌리는 새 사라지네

始識子荊非善謔   자형이 농담 잘 못함을 알겠으니

終宵一枕枕寒流   밤새도록 찬 물결에 선잠 이루네

 

역주:  자형의 농담

*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유별남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진(晋)나라 초기 손초(孫楚)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있었다. 자는 자형(子荊)이었는데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당시에는 노장학이 성해서 속세를 피해서 숨을만한 곳을 구하는 경향이 강했고 세속적인 도덕 명분을 경시하여 노장의 천리를 논하는 것이 중시되었다.
  이것은 청담(淸談)이라 불리면서 사대부간에 유행되었는데 그 첨단에 완적(阮籍), 혜강 등이 모인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있었다.
  손초도 젊었을 때 그런 풍조를 따라 산림에 은신하려고 했지만 사십이 넘어 석포(石苞) 밑에서 참군(參軍) 노릇을 하며 석포를 위해 오주 손호(吳主 孫皓)에게 보내는 투항 권고문 등을 작성했다. 후에 풍익(馮翊)의 태수가 되어 원강(元康) 3년(293년)에 죽었다고 하므로 60세가 되었음직하다.
  그 손초가 젊었을 때의 일이다. 속세를 떠나 산림에 은신하기로 결심하고 친구인 왕제에게 있는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그때,

「돌을 베개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한다 (枕石漱流)」

  라고 해야 할 것을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 (漱石枕流)」

  라고 잘못 말해 버렸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벨 수 있는가? 그리고 돌로 어떻게 양치질을 한단 말인가?」

  왕제가 그 말을 듣고 반박하자 손초는 재빨리 변명했다.

「흐름을 베개로 한다는 것은 옛날의 은자인 허유(許由)와 같이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귀를 씻으려고 하는 것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으려는 것일세.」

 

                 농월정 단련   弄月亭 單聯

 

                              인산 김일훈

 

月亭雲散谷幽峨   정자에 구름 흩어지니 골은 그윽하고

萬壑淸流碎玉波   온 골짝 맑은 물살에 옥 물결 부서지네

 

                숭례문과 농월정   慨歎崇禮門全燒(2008.02.11.02:00) 追憾弄月亭全燒(2003.10.05)

 

                                         김윤수 작, 역

 

千年門閣燬于斯 천년의 문루가 여기에서 소실되고

世祖銅鐘鎔化之 세조시대의 동종도 불타 사라졌네

五載口勞官不備 5년 동안의 입 정치 관청은 무방비

相臣負鼎責今時 재상의 책임이니 지금에서 책하라

 

역주: 주역에 정절족(鼎折足), 복공속(覆公)이라고 있으니, 재상이 자기 소임을 다 못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의 참상을 교훈삼아 재발 방지 조치를 약속하고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당장 물러나야 옳은 것이다. 말만 앞세우는 운동권 정부의 전형이다. 5년간 국민의 미움을 산 대통령도 500억 들여 사저 정비 하는데 국보의 관리에 돈 한푼 아끼는 것이 그들의 문화복지정책이다.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엄청난 국고를 쓰는데 국보 예우에 관한 법률도 만들어 모든 국보에 의경을 시켜 24시간 경호하게 해야 한다.

 

                    거연정   居然亭

 

                                설악(雪嶽) 강수환(姜璲桓)

 

轉到花林洞   발길을 돌려 화림동에 이르러

逢奇輒停行   기경을 만날 때마다 걸음 멈추네

夢淸山間屋   산골 집에서 자니 꿈조차 맑고

醉倒石上亭   취하여 돌 위의 정자에 드러눕네

仰止前輩躅   선현들의 발자취 우러러보니

殷勤故人情   은근한 고인들의 정이 느껴지네

欲滌塵世累   풍진 세상의 더러움 씻어버리려고

更臨碧波汀   다시 푸른 물결의 용소에 임하네

 

                     용유담   龍游潭

 

                                  저촌(樗村) 심육(沈錥, 1685~1753)

 

幽潭深黑號龍游   그윽한 못 깊고 검어 용유담이라

老石蒼松閱萬秋   오랜 돌과 푸른 솔이 만년을 지나

不肎身隨兒輩去   아이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으니

登高爭似對安流   산에 오름이 어찌 물놀이만 하랴

 

역주: 함양에는 용유담이 두 곳이 있으니 휴천면 문정리 지리산 용유담이고, 이 시가 지어진 서하면 봉전리 월평마을 앞 화림동 용유담이다. 화림동 용유담은 송계마을 송정(松亭)주인 무신란 의병장 전근(全瑾)이 소요하던 곳으로 그 기념 석각이 있다.

 

                   황석산성   黃石山城

 

                                   물천(勿川) 김진호 (金鎭祜, 1845-1908)

 

黃石孤城信險關   황석산성은 참으로 험준한 요새이니

危譙萬丈不堪攀   높은 망루는 만 길이라 못 오르겠네

一夫失守如平地   한 사람이 잘못하니 무인지경이 되어

二老捐生重泰山   두 원로가 순국하니 태산보다 중하네

 

역주: 정유재란 때 왜군이 황석산성을 포위하자 김해부사 백사림이 성문을 열고 도망하매 적군이 밀고 들어와 전 함양군수 대소헌 조종도와 안음현감 존재 곽준이 전사, 순국하였다.

 

                   안음 옥산동(농월정 계곡) 유람   遊安陰玉山洞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1.

백석운천면 白石雲千面   흰 바위 흰 구름 천 가지 모양

청라직만기 靑蘿織萬機   푸른 덩굴 만 개의 베틀로 짠 듯

막교모사진 莫敎摸寫盡   다는 묘사하지 말게나

내세채미귀 來歲採薇歸   내년에 은거하러 올지니.

 2.

벽봉고삽수여람 碧峰高揷水如藍   푸른 봉우리 깍아세운 듯 물빛은 쪽빛인 듯

다취다장불시탐 多取多藏不是貪   많이 가지고 많이 간직해도 탐욕이 아니네

문슬하수담세사 문蝨何須談世事   이를 잡으면서 하필 세상사 이야기하나 (문 才+門)

담산담수역다담 談山談水亦多談   산 이야기 물 이야기 또한 이야기 거리가 많나니

3.

춘풍삼월무릉환 春風三月武陵還   봄바람 삼짇달에 무릉도원 돌아오니

제색중류수면관 霽色中流水面寬   비 개인 날 냇물 수면도 너르구나

불시일유비분사 不是一遊非分事   한번 노니는 것 분수밖의 일이 아니지만

일유인세역응난 一遊人世亦應難   한번 노니는 것도 인간 세상에 어렵구나

 

역주: 남명 66세(1566) 3월에 옥계 노진 댁(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을 거쳐 갈천 임훈 댁(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을 예방하고 함께 안의 삼동(원학동,장수동(심진동),옥산동(화림동)) 유람. 옥계 노진, 개암 강익, 각재 하항, 대소헌 조종도, 영무성재 하응도, 조계 유종지, 모촌 이정이 수행하다. (2006.12.26 함양문학 15호)

 

                          안의삼동과 대전거제철도선

 

    春風三月武陵還   봄바람 삼짇달에 무릉도원 돌아오니    

    霽色中流水面寬   비 개인 날 냇물 수면도 너르구나           

    不是一遊非分事   한번 노니는 것 분수밖의 일이 아니지만     

    一遊人世亦應難   한번 노니는 것도 인간 세상에 어렵구나     

 

이 시는 남명 조식 선생이 안의 삼동을 유람하며 화림동을 읊은 것이다. 화림동의 수려한 풍경을 무릉도원으로 인식하고 무릉도원에 한번 노니는 것이 분수 밖의 일이 아니지만 한번 이렇게 노니는 것도 인간세상에서 쉬운 일이 아님을 토로한 것이다. 인간세상에 한번 노닌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릉도원이란 표현과 맞지 않다. 무릉도원은 인간세상이 아니니 인간세상에서 무릉도원을 노니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화림동을 인간세상이 아닌 신선의 세계 무릉도원으로 극찬하고 한번 노니는 것을 일대쾌사로 간주한 것이 핵심이다.

조선시대 안의현 지역으로 함양의 심진동, 화림동, 거창의 원학동 계곡을 통칭하여 안의삼동이라 하였다. 고금에 걸쳐 명승지로 유명하여 남명 등의 현자와 금릉 남공철 등의 문인들이 끊임없이 유람을 다녀갔다.

안의삼동 중 심진동 역사를 보면 일두 정여창 선생은 용추폭포 위에 처음으로 물고기를 방류하여 번식시켜 주민들의 식량으로 삼게 한 애민정신을 발휘하였다. 옥계 노진 선생은 용추폭포 위에 있던 장수사를 유람하고 유장수사기를 남겨 심진동 용추계곡의 역사와 풍경을 소상히 전해주었다. 돈암 정지영 선생은 명종시대 심진동에 은거하며 심진동 유일의 역사적 정자인 심원정을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각연조사는 천년고찰 장수사를 창건하였고 무학왕사는 상류에 은둔하여 은신암을 창건하였다. 일두, 옥계, 돈암, 각연, 무학을 심진동오현으로 통칭한다. 인산죽염도시와 인산한의원의 후원으로 제3회 용추국제자연예술제(위원장 김윤수)를 개최할 때 심진동오현에 대하여 심진동을 빛낸 공덕을 기리고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헌다례를 기획하였다.

원학동은 동계 정온 선생, 갈천 임훈 선생 등 명현을 배출한 고장이다. 지금은 거창군으로 일제가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양군으로 분할한 것을 광복후 혼란기에 복원시키지 않고 준수한 것은 잘못이다. 거창은 고려말(1271) 왜구 때문에 거제현이 가조 지역으로 옮겨와 150여년을 살며 거창현과 거창에 옮겨온 거제현과 합쳐 제창현이라고도 하였다.

거창은 함양과는 이웃사촌 고을이나 함양울산간고속도로 노선으로 대립하고 지금 대전거제간 철도 노선으로 또 대립하고 있다. 어차피 함양 철도역이 개설되면 대진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안의 지역에 들어설 가능성이 많으니 안의에서 함양읍도 10분, 거창읍도 10분이다.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 서로 타협하고 상생해야 한다. 거창군도 대승적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제창현의 우호를 살려, 안의를 매개로 대전거제간 철도 노선 개설에 적극 동참해야 할 것이다. 대거선 11개 시군에 합류하여 12개 시군이 합력하여 이명박 후보에게도 대선공약으로 꼭 채택되게 해야 할 것이다. (2007.10.25 경남일보 경일춘추, 2007.12.26 함양문학 16호)

 

제8경. 용추폭포

 

                       용추폭포   龍湫瀑布

 

                                    김윤수 작, 역

 

長水寺龍深隱湫   장수사의 용이 깊이 용추에 숨어

吐雲吐玉繼春秋   구름과 옥을 봄 가을로 토해내네

蠹魚放殖泉流上   일두어를 상류에 방류한 일두선생

足食惠民君子遊   식량 증식 백성 혜택 군자의 여행

 

                     장수사 폭포 구경   長水寺看瀑

 

                                                저촌(樗村) 심육(沈錥, 1685~1753)

 

曾看雪嶽寒溪瀑   일찍이 설악산 한계폭포를 보았지

渴雨方成細細流   가뭄에 가느다란 물줄기로 흘렀네

未若玆潭能澤物   못하지 이 못이 만물을 윤택하게 하며

長時噴薄吼龍湫   언제나 용추에서 울부짖으며 뿜어댐만

 

                      심진동 용추계곡 초입     入洞門     

 

                                               저촌(樗村) 심육(沈錥, 1685~1753)

 

兩岸幽花重疊明   양쪽 언덕 그윽한 꽃 겹겹이 피고

中間流水有深聲   중간에 흐르는 물 깊은 소리 있네

行行且近龍湫下   걸음걸음 점점 용추에 가까운데

世外烟霞分外淸   세상밖 안개 노을 분수밖 맑구나

 

                    심원정에 올라   尋眞洞登鄭氏尋源亭次原韻鄭公榮芝解紱來遯于此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 1827~1903)

 

尋眞行屐憩斯亭   심진동 여행길 이 정자에서 쉬니

雲仍紛集喜迎客   후손들 모여 기쁘게 손을 맞이하네

先輩遺風想依然   선배의 유풍을 생각하니 아련한데

臨流簸弄澗邊石   시냇가의 바위에 앉아 물장구치네

 

                    심진동   尋眞洞 二首

 

                                 어은(漁隱) 오국헌(吳國獻, 1599~1672)

 

尋眞洞是我尋眞   심진동에서 나는 참을 찾네

隨處問尋若有眞   가는곳마다 묻고 찾으니 참이 있는 듯

竟日行尋尋不得   온종일 다니며 물어도 찾지 못하네

尋眞豈是道心眞   찾는 참은 어쩌면 마음의 참이 아닐까

 

其二

 

尋眞洞是我尋眞   심진동에서 나는 참을 찾네

隨處窮尋不見眞   가는곳마다 끝내 찾아도 참을 못 보네

若使世人尋去得   세상 사람들에게 찾아내게 한다면

尋眞惟是道心眞   찾는 참은 오직 마음의 참일 것이네

 

                  무진송   無眞頌

                

                                 김윤수 작, 역

 

尋眞洞裏訪眞人   심진동에서 참을 찾는 사람들

千古幾何求得眞   천고에 얼마나 참을 찾아냈나

初入龍湫居國手   용추계곡 초입에 국수가 살아

無眞眞畵實傳神   무진의 참그림 실로 신필이네

 

           문곡대사 진영찬   文谷大師影贊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

 

口學勞   입으로 하는 학문은 수고롭고

心學高   마음으로 하는 학문은 고상하네

頓悟之言   갑자기 깨닫게 되는 말씀

妙不在多   신묘함은 많을 필요 없네

惟口是騖   입으로만 달리는 일

衆生則那   중생들이 그러하네

升者其氣   기운은 올라가고

蛻者其影   진영만 남아 있네

因依有所   의지할 데가 있으니

盍禮以頂   어찌 예배하지 않으리

 

장수사 문곡지탑

문곡대사비명 文谷大師碑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대사의 법휘는 영회(永晦)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장수사(長水寺)에 들어가 묘언(妙彦) 스님에게 투신하였다. 이미 몇 해가 지나가자 묘언이 그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기이하게 여겨 타이르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 너는 회당(悔堂)을 귀의처로 삼아라."고 하였다. 회당은 곧 정혜대사(定慧大師 1685~1741 원호는 회암晦庵이다)니 화엄종주로 유명하였다. 스님은 힘써 귀의하였다. 배운 지 몇 년 되어 바야흐로 불경에 통달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입으로 하는 학문은 수고롭고 마음의 학문은 고상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소매를 떨치고 금강산과 묘항산에 들어가서 정신을 오로지하여 안으로 참구하고 삼매(三昧)가 아니면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 우리 유가는 불가를 비난하여 이단이라고 한다. 비난하는 자가 자격이 있은 뒤에야 비난당하는 자가 그 그름을 안다, 지금의 학자는 어찌 일찍이 마음으로 하고 입으로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배운 바가 참으로 성리학의 책 몇 권만 섭렵하면 피곤할 정도로 그 입에 올리는 것은 성명(性命)이니 이기(理氣)니 하는 것이다. 명성이 여기에 있고 영화로움과 이익이 여기에 있다. 그 마음을 돌아보면 이미 황폐해졌다. 그런 자들은 남들을 바로 잡을 겨를이 없이 남들에게 바로잡히느라 겨를이 없을 것이다. 스님의 기풍을 들으면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

  스님은 만년에 덕유산 향적봉 아래 구천동(九千洞) 백련사(白蓮社)에 머물며《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등 책으로 사방에서 오는 이들을 교수하였다. 71세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법랍(승려가 된 햇수)은 55세이다. 다비(승려의 화장식)하는 날에 기이한 징조가 많았다고 한다. 스님의 속성은 이씨로 농서군공(농서군공:이장경李長庚 성주이씨의 중시조)의 11세손이다. 문곡은 그 호이다. 그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 산청 율곡사의 봉암대사의 제자로 채제공에게 봉암대사 비명을 받으러 간 스님)으로 하여금 편지를 갖고 천리 길을 달려 나에게 비명을 청하게 하였다. 그 의리가 가상하여 명(銘)한다.

나는 우리 유가를 옳게 여기니

부처에게 어찌 아첨하리오

명을 지어 후세에 보이나니

한마디 말이 뜻에 맞으리.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영조 때에 판서를 역임하고 정조 4년(1780) 이후 8년간 서울 근교 명덕산(明德山)에서 은거한 뒤 정조 12년(1788)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 후기 남인 정승으로 명재상이었다. 어릴 때 단성현감인 부친을 따라 산청에서 6년을 살아 그 인연으로 율곡사 승려 봉암대사(鳳巖大師의) 찬영문(讚影文)과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1772년 영조 48년에 문곡(文谷)대사가 백화(白花), 환암(喚庵) 대사와 함께 영원암(靈源庵 마천면 삼정리)에서 만일회(萬日會) 개최. 문곡은 이 몇 년 뒤에 서거하고, 환암은 영원암에서 10년 살다 서거함.경암집.1778년 정조 2년에 문곡(文谷)대사의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으로 하여금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게 찾아가 문곡대사의 비명(碑銘)을 받아오게 함. 풍신은 봉암(鳳巖)대사의 제자로 임색(任臣+責)의 편지를 가지고 번암을 찾아가 봉암대사의 비명을 받아오기도 하였다.번암집. 문곡대사는 함양군 안의면의 장수사 출신이라서 장수사 터 용추폭포 위쪽 기슭에 부도가 있다. 석종형 부도로 문곡지탑(文谷之塔)이라 새겨져 있다. 문곡대사의 스승 묘언은 번암 채제공이 영찬을 지은 취은대사로 추정된다. 취은대사의 영정은 장수사 육사탱(1788년 정조 12년 은신암 산신탱과 일괄 그림)으로 남아 있다. (함양문학 제7호, 1998.12)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文谷大師碑銘
 

大師法諱永誨。十三。出家入長水寺。投玅彦師。旣數年。玅彦異其聰慧。諭之曰。吾不敢闍梨爾。爾其以晦堂爲歸。晦堂卽定慧大師。以華嚴宗主名。師俛焉歸依學幾年。方且見星於法海三藏。一日忽曰。口學勞心學高。遂拂袖入楓嶽竗香。專精內究。非三昧不屑焉。嗚呼。吾儒詆佛氏以爲異端。詆之者有諸己而後見詆者知其非。今之學者曷嘗有以心而不以口者乎。所學苟能涉程朱書數卷。敝敝焉尙厥口。曰性命也。曰理氣也。聲名焉在是。榮利焉在是。顧其心茅已塞矣。若然者。吾恐其未暇正人而見正於人之不暇也。聞師之風。庶可以知所警矣。師晩住德裕香積之下九千洞白蓮社。以華嚴圓覺楞嚴書。敎授四方來者。七十一怡然示寂。法臘五十五。闍維之夕。多異徵云。師俗姓李。隴西公十一世孫也。文谷其號。其徒貽成。使豐信賫書走千里。乞銘於余。其義足尙。銘曰。

吾是吾儒。佛何足媚。銘以示後。唯是一言契意

 용추사 부도군(龍湫寺 浮屠群)  

 

용추사(龍湫寺) 건너편 용추폭포 위쪽 기슭에 석종형 부도 3기가 있는데 1기는 둥근 대형 좌대석 위에 있다. 그것은 청심당(淸心堂)의 것이고 나머지 2기는 "문곡지탑(文谷之塔)", "연우당축훈대사탑(煙藕堂竺訓大師塔)"이란 명문이 있으나 문곡대사 외는 모두 시대와 사적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덕유산 심진동 장수사 용추암 연혁

 

                                                                 수우 두혜(守愚杜慧)

 

*신라, 고려 사이의 사람인 각연(覺然) 성인이 덕유산에 장수사를 창건하였다.

*1680년(강희19,숙종6) 경신 11월 28일 야반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절 앞의 냇물 아래 수백 보쯤에 너른 땅을 개척하여 절을 옮겨 짓기로 하였다.

*1681년 신유 봄에 화상 운흡(雲洽), 전주지 수오(秀悟), 의경(義瓊), 삼인(三印), 초은(楚山+言) 등 5~6인이 모금하여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1690년(강희29,숙종16) 경오 가을에 완공하였다.

*1684년 갑자 봄에 대덕 문찬(文贊)이 법당을 건립하여 1685년 을축에 준공하였다.

*대선사 문감(文鑑)이 불상을 조성하였고, 신도 이영생(李英生)이 시왕상을 조성하였는데 전화상 각위(覺位)가 내조하였다.

*1686년 병인에 신도 김상운(金尙雲)이 대루를 세우고 막 상량하려는데 바람이 불어 쓰러졌다. 1687년 정묘에 대중이 고쳐 지었다.

*산인 지찰(智察)이 팔상전 및 팔상탱과 시왕전을 조성하였는데 별좌는 대선사 선일(善逸)이었다.

*1711년(강희50,숙종37) 신묘년중에 호남의 두혜(杜慧)가 조계문(경남유형문화재54호 덕유산장수사조계문)을 세웠다.

*1702년(강희41,숙종28) 임오년중에 동편과 서편이 함께 천왕문을 만들었다.

*대종은 옛것이다.

*1681년 신유년중에 선당, 승당, 서상실은 각기 거주인이 만들었다.

*동상실은 거주인이 같이 만들었는데 1689년(강희28,숙종15) 기사 2월에 불이 나 그해에 바로 중건하였다.

*청풍료는 거주인이 같이 만들었는데 1716년(강희55,숙종42) 병신 3월에 불이 나 당년에 중건하였다.

*1702년(강희41,숙종28) 임오년중에 만월당과 명경당은 동편과 서편이 모금하여 함께 만들었는데 이 2방은 다 뒤에 만든 행랑이다.

*새터의 연대는 다 강희년중이다.

*팔상전과 법당은 예전에 새터에 있었는데 1721년(강희60,경종1) 신축 봄에 용추 옛터에 이건하였고 전의 삼존불상 화주는 선덕 현오(玄悟)이다.

*1725년(옹정3,영조1) 을사년중에 용추암을 건립하였는데 암자의 불상은 서흥암에서 가져온 것이다. 선승을 권유해 들어가 법당을 지키고 향화를 끊어지지 않게 한 것은 옛터를 존중해서이다. 용추암의 신건 화주는 산중의 선덕 서언(瑞彦)화상이다.

*1734년(옹정12,영조10) 갑인 11월 1일 대웅전 위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나 불상과 탱화 및 서상실과 향각까지 다 소실되었다.

*1735년 을묘년중에 회암정혜(悔庵定慧 1685~1741)의 제자 호경(護敬)이 모금하여 법당, 불상, 탱화, 삼전위판, 소대, 서상실, 향로전 등을 중건, 조성하였다.

*그중에 법당을 세운 이는 두인(斗仁), 영우(靈祐), 삼준(三俊), 광연(廣衍)이고 내조자는 통정 신기(愼琦)이다. 통정 축잠(竺岑)은 감사이다.

*법당 현판은 호남의 송필산인(宋筆山人) 선열(禪悅)이 새겼다.

*체환(體環), 숙문(琡文) 등이 불상, 탱화 삼전위판, 소대, 운룡을 함께 조성하였는데 관학(管學)이 내조하였다.

*향로전은 법당의 여력이고 서상실은 거주인의 합작이다.

*1736년(건륭1,영조12) 병진에 선덕 사순(思舜), 장로 충욱(忠旭), 민호(敏浩) 등이 모금하고 동편과 서편도 모금하여 법당에 그림을 그렸는데 통정 의관(義寬)이 내조자이고 찬행(贊行)이 감사이다.

*선사 체환(體環)과 통정 관학(管學)이 서로 도와 법화경 1백여 권을 간행하고 목함 2좌를 만들고 옻칠하여 수장하였다.

*금가의 7권경은 대사 숙문(琡文)이 경기도 양주군의 지덕사에 가서 가져왔다. 황가의 20권경은 함양군 엄천사에서 가져왔는데 인쇄한 화주는 처사 김중삼(金重三)이고 가져온 이는 원통암의 승려 탄민(坦敏)이다.

*심진동 장수사 부속 암자는 동쪽에 도솔암, 서쪽에 백련암, 북쪽에 용추와 은신암이 있었다. 기타 서흥, 원적, 견성, 영악, 보제, 천진, 무주 등 9개 암자는 터만 있었고 북쪽으로 영축산에 수방암, 동쪽으로 망월암, 각연조사의 부도가 있는 부도암이 있었다.

*1736년 병진 2월에 춘계(春溪) 수우두혜(守愚杜慧)가 용추암에서 참선을 하였고 단오에  풍학(豊學)의 요청으로 용추암 창건,중수의 원류,흥폐의 기록을 지었다. (함산초역)

 

서명: 安陰長水寺與龍湫菴創修源流興廢錄

현대어서명: 안음장수사여용추암창수원류흥폐록

청구기호: 奎 6204

책수: 1冊(6장)

저자: 杜慧(朝鮮)編

간행년대: 무

판본: 필사본

사이즈: 30.2×19.6cm.

1736년(영조 12) 守愚 杜慧가 경상도 安陰의 長水寺 창건 및 興廢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 杜慧에 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표지서명은 <龍湫寺蹟>이다. 이 사적은 1734년(영조 10) 화재를 당하여 절이 소실됨으로써 이를 안타까이 여겨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長水寺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古刹로서 이 책에는 사찰의 위치와 風水上의 의미, 사찰의 창시연원 및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의 興廢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은신암에서   隱身庵 四首

 

                                      경암응윤(鏡巖應允, 1743~1803)

 

1

有緣携一鉢   인연 따라 바리때 하나 들고

信錫步還迷   석장 날리며 걷다 길 잃었네

路入無人處   길은 사람없는 곳으로 향하고

山高隱者棲   산은 높아라 은자가 사는구나

晩風松檜暗   늦바람에 소나무 어둡고

新月杜鵑啼   새달에 두견새 우는구나

此處眞安樂   이곳이 참으로 안락세계니

何須更往西   하필 다시 서방정토 갈거나

2

不須尋友往城南   벗을 찾아 성 남쪽에 갈일 없지

栢樹環山鎖翠嵐   잣나무 산 두르고 아지랑이 감싸네

從此便爲深隱計   이로부터 깊숙이 은거할 계획이니

吾師無學有斯庵   우리 스님 무학대사의 이 암자에서

3

禁足銀山下   은빛 산 아래 내려가지 않고

觀心玉府開   마음 공부 옥빛 세계 열리네

虛窓飛絮舞   빈 창문에 솜털 날리고

斷壑積鹽頹   골짝에 쌓인 소금 무너지네

戴白松應老   흰머리 소나무는 늙었겠지

埋靑竹未胎   죽순은 아직 솟아나지 않았네

乾坤多造化   하느님은 조화가 대단해

枯木放花來   마른나무에 흰꽃피게 했구나

4

一番逢處一番別   한번 만난 곳에서 한번 이별

五載逢三別亦三   5년 동안 3번 만남과 이별

我與浮雲無定住   나는 뜬구름과 함께 정처가 없으니

留君看護古仙庵   그대에게 옛 암자를 지키라 하이

 (2007.12.26 함양문학 16호)

 

제9경. 덕유산영각사

 

                영각사에 이르러   到靈覺寺   

 

                                저촌(樗村) 심육(沈錥, 1685~1753)

 

難如蜀道解凋顔   촉도보다 더 험한 길 넘어

爲借禪樓半日閑   절의 누각에서 반나절 쉬네

忽聽風塵多少語   속세의 말소리 갑자기 들려오니

還敎寶界落人間   정토세계가 인간세계로 변했나

 

                 먼저 영각사에 이르러 벗을 기다리며   先到靈覺寺待友

 

                               죽헌(竹軒) 하성(河惺, 1571∼1640)

 

一柱門前山日暮   일주문 앞에 산골 해는 저무는데

良朋有約不來何   약속한 벗이 오지 않으니 어찌하랴

僧言前路花林洞   스님이 말하길 앞길이 화림동으로

曲曲淸溪坐石多   굽이굽이 맑은 시내 반석도 많지요

 

                    영각사 동학란 일기   嶺上日記(南原儒生 金在洪)

 

                                                 김재홍

 

甲午(1894) 七月望余與聖授及徐丈秉五金▣▣擇可居之地自長水踰六十嶺抵安義靈覺寺

歷覽德裕山仰看宋同春先生昔日避地山川草木至今有精彩庶乎有隱君子存焉遡從無路臨風悽愴而已

南原賊徒數百自▣陽入安義縣郡守趙元植暗募民丁乘夜設機捉賊徒三四百名盡誅之咸陽民丁亦捉▣徒數十盡殺之

余時在靈覺寺聞之甚快

 

7월 보름에 나와 성수 및 서선생 병오, 김모가 살 만한 곳을 택하여 장수에서 육십령을 넘어 안의 영각사에 이르렀다.

덕유산을 두루 보고 동춘당 송선생의 옛날 피난지를 우러러보니 산천 초목이 지금도 정채롭다. 아마도 은군자가 있는 듯하였는데, 거슬러 올라갈 길이 없어 바람을 맞으며 슬퍼할 뿐이었다.

남원의 동학란 적도 수백 명이 함양에서부터 안의현에 들어오니 군수 조원식이 몰래 민병을 모아 밤을 타 매복하여 적도 3~4백 명을 잡아 다 죽였다. 함양의 민병도 적도 수십 명을 잡아 다 죽였다.

나는 당시 영각사에 있었는데 듣고서 매우 통쾌하게 여겼다.

 

                               육십령에 올라   登六十峴

 

                                                       뢰계(뢰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隱隱曉鍾靈覺寺   영각사의 은은한 새벽 종소리

毿毿霜葉碧鷄城   벽계성에 풀풀 날리는 단풍잎

馬知舊路行迢遞   말은 옛길을 알아 까마득히 가고

木喜淸秋下杳冥   낙엽은 가을이 좋아 아득히 가네

千里每窮南斗望   천리길에 매양 부모님 고향을 바라보고

五雲遙隔北辰誠   임금님께 멀리 북극성 향한 정성 막혔네

西風淡日催佳句   서풍에 맑은 해는 멋진 시구를 재촉하니

猶自孤吟滯客程   외로이 시를 읊조리느라 여정을 지체하네

 

                               육십령을 넘으며   過六十峙。峙在安陰,長水兩境。距安六十里。故名。

 

                                                    겸재(謙齋) 조태억(趙泰億, 1675~1728])

 

短僕驅羸馬   어린 종으로 파리한 말을 몰며

穿雲上嶺頭   구름을 뚫고 고개 마루에 오르네

穹林不見日   울창한 숲에 해는 보이지 않고

盛夏忽如秋   더운 여름이 갑자기 가을날 같네

乍聽人聲喜   문득 사람 소리 듣고 기뻐하나

頻逢虎跡愁   자주 범의 자취 보며 근심하네

猶存丈夫志   그래도 대장부의 뜻을 지녀   

未厭四方遊   사방 유람을 싫어하지 않네

 

원주: 안의에서 육십리이기 때문에 육십치라 한다.

 

                                    대로마을 동춘장구소 석각

               안음 노천에 동춘선생이 심은 큰 고목이 있는데 보고 느끼어 짓다   安陰蘆川 有一大古木 乃同春先生手植也 感賦一絶

 

                                      돈재(敦齎) 유상대(柳相大, 1864-1935)

 

下覆靑郊上接天   아래로 푸른 들판 덮고 위로 하늘에 닿은 채

風霜閱盡飽經年   온갖 풍상을 겪으며 수백 년 세월을 지냈네

至今樵牧勤相護   지금까지 나무꾼과 목동들이 서로 보호하니

不識玆心孰使然   모르겠어라 이 마음 누가 그리 하게 하는가

 

돈재 유상대는 진주 유씨로 합천군 용주면 가호리에서 태어나 노백헌 정재규와 경승재 유종원 및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 등에게 수학하였다. 화림동과 원학동을 유람하며 이 시와 함께 영각사, 월성초당, 모리, 수승대 시를 지었다.

동춘당 송준길은 인조 14년(1636) 6월23일에 김상용(金尙容)의 천거로 예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실록》.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음으로 피병(避兵)하고 그곳의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것을 사랑하여 1년을 살다가 비로소 향리로 귀환하여 학도들을 가르쳤다.  "丙子…是冬 避兵至安陰 愛其山高水淸 居一年 始還鄕里 學徒日衆" 《同春堂集 송시열이 지은 墓誌文》. 안음의 어디에서 살았을까? 『안의현읍지』 방리(坊里) 조에 보면 북상면(北上面)이 있고 그 소속 촌에 "월성(月星);문정공 송준길이 일찍이 우거하였다."라고 하였고 서상면(西上面)이 있는데 그 소속 촌에 "노천(蘆川);문정공 송준길이 잠시 우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월성은 현재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이고 그곳 내계마을에는 송준길이 은거했던 송여산기(宋礪山基)에 다시 세운 월성초당이 남아 있고, 월성리 월성마을에서 황점(黃店)마을 가는 중간 월성1교 옆 길가에는 사선대(四仙臺)가 있는데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어서 송대(松臺)라 하기도 한 송준길의 유적이다. 노천은 현재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大南里) 대로(大蘆)마을(구명 노천동蘆川洞)이다. 거기에 모은정(慕隱亭)이 있다. 모은정 아래 반석에는 반암(磻岩)이라 새겨져 있고 그 옆에

동춘장구소 同春杖所   동춘선생이 산책하던 곳

노천화석정 蘆川花石亭   노천의 화석정이라네

영사구초엄 永思舊草广   영사선생의 옛 초가집

가포대은병 稼圃大隱屛   농촌의 대은병이라네

이란 절구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예전 동춘당이 소요하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화석정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가에 있는 정자로 율곡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이다. 대은병은 중국 주자가 은거한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는 무이산(武夷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율곡선생은 은거한 황해도 해주의 석담구곡이 그와 비슷하여 은병이라 이름하고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었다. 영사선생은 효자 서준(徐儁)의 호이고 동시에 그의 묘각의 이름이다. 영사재는 대로마을 아래 마을인 오산에 있다. 동춘당은 이곳에서 두 달 정도 살다가 북쪽의 월봉산을 넘어 거창 북상의 월성으로 옮겨가 초당을 짓고 8개월 정도 기거하다가 귀향하였다. 이 월성동과 노천동에서 한 자씩 따와서 성천서원이라 이름한 것이다. (함양문학 8호, 1999.12.01)

동춘당이 이곳 노천과 월성에 산 것을 기념하여 안음현감 정중만(鄭重萬)이 안음 유림과 함께 숙종 29년(1703)에 화림동 계곡의 하류인 함양군 안의면 후암리에 성천서원(星川書院)을 건립하고 동춘당 송준길을 제향하였다. 헌종 10년(1844) 경에 거창군 북상면 월성으로 이건되었다가 고종 9년(1872)에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77년에 초당계에서 서원 터에 동춘송선생월성초당유허비(同春宋先生月星草堂遺墟碑)를 추연 권용현이 비문을 짓고 강암 송성용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여기에서 영조 18년(1742)에 서원을 월성으로 옮겼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동춘당은 현종 6년(1665)에 고려대장군 여림청(呂林淸)의 묘표음기를 지었는데 그 비석은 현재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임호마을의 여장군 묘소 앞에 서 있다. (2006.12.26 함양문학 15호)

 

부록

 

함양역사연표 咸陽歷史年表

 

삼국시대 B.C.57~668

 

 

남북국시대 699~935

 

 

고려시대 918~1392

 

 

조선시대 1392~1910

 

 

대한제국항일시대 1911~1945

 

 

남북한시대 1945~

 

 

 

소속 대한민국 경상남도: 조선 경상도, 경상우도, 진주부(1895), 경상남도(1896); 고려 경상도; 통일신라 강주(康州).

군명 이칭: 속함(速含), 함성(含城), 천령(天嶺), 허주(許州), 함양(含陽)

가야 고분군: 백천리, 상백리

 

삼국시대

 

188년 신라 벌휴이사금 5년 2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 아막성 남원시 아영면 성리, 천령군의 속현인 운봉현의 옛 이름)을 공격하니 파진찬 구도가 방어

188년 백제 초고왕 23년 2월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

484년 신라 소지왕 6년 7월 고구려가 북방 국경을 침범하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모산성 아래에서 격파

576년 신라 진흥왕 서거, 차자 진지왕 즉위, 태자 아들 진평왕 함양으로 피신

579년 신라 진평왕 즉위, 잠저시 별궁에 군자사(君子寺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터) 창건

624년 신라 진평왕 46년 백제 무왕 25년 백제가 신라의 속함, 앵잠 등 6성 공격, 속함성 등 3성 함락, 신라 장군 눌최(訥催) 전사

 

남북국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토속 지명을 한문 지명으로 고쳐 천령군이라 개칭

822년신라 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반란, 최웅(崔雄) 토벌 공으로 속함군 태수에 임명

828년 신라 견당사 김대렴(金大廉) 중국에서 차 씨를 가지고 와 하동, 구례, 산청(속두류록), 함양 등지 지리산 일대에 심음

876년 신라 헌강왕 2년 심광대사(深光大師)가 영각사(靈覺寺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창건, 심광대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인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의 제자로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에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은 백월보광탑비에는 심광(心光)이라 표기되어 있다.

883년 신라 헌강왕 9년 엄천사(嚴川寺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터) 창건, 낙성식에 헌강왕 행차

897~898년 신라 효공왕 1~2년 고운 최치원 선생 천령군 태수 재임, 대관림 조성, 학사루 건립, 상련대 창건. 최치원이 해인사 승려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아래에 "방로태감(防虜太監) 천령군 태수(天嶺郡太守) 알찬(알粲17관등 중 제6관등) 최치원(崔致遠)"이라고 썼다.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시대

 

995년 고려 성종 14년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

1012년 고려 현종 3년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

1172년 고려 명종 2년 함양현 감무 (咸陽縣監務)로 강등

1380년 고려 우왕 6년 왜구 침입, 사근산성(沙斤山城) 함락, 함양현 감무 장군철(張群哲) 전사1391년 고려 공양왕 3년 이안현(利安縣 거창군 마리면과 함양군 안의면)을 감음현(感陰縣 거창군 위천면과 북상면)에 병합

 

조선시대

 

1395년 조선 태조 4년 함양군(咸陽郡)으로 승격,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1417년 조선 태종17년 감음현을 안음현으로 개칭, 관청을 안의면으로 옮김

1466년 조선 세조 12년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를 함양군수(咸陽郡守)로 개편

1474년 성종 5년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 선생 관영 다원(茶園)을 조성하고 다원 시를 지음

1597년 선조 30년 황석산성(黃石山城) 함락, 전함양군수 조종도, 안음현감 곽준 순국1629년 인조 7년 기사 함양 출신 양경홍의 역모 사건으로 현으로 강등 명령

1630년 인조 8년 경오 최산휘崔山輝 함양현감으로 부임

1643년 인조 21년 계미 함양현은 함양군으로 복군, 정홍명이 함양군수로 부임

1728년 영조 4년 무신 안음 출신 정희량의 반란 일어남

1729년 영조 5년 기유 안음현 혁파, 함양군과 거창군에 분속, 함양군수는 함양부사(咸陽府使)로 승격

1736년 영조 12년 안음현 복구

1759년 영조 35년 함양부 호구수 4,763호 21,640인

1767년 영조 43년 안의현으로 개칭

1771년 영조 47년 안의현 호구수 4,565호 19,311인

1788년 정조 12년 함양군으로 환원

1789년 정조 13년 함양군 인구수 24,198

1894년 고종 31년 갑오경장으로 사근도 찰방 폐지

1895년 고종 32년 안의현이 군으로 개편

 

대한제국항일시대

 

1914년 안의군 폐지, 화림동(花林洞)과 심진동(尋眞洞)은 함양군으로, 원학동은 거창군으로 분속

1930년 함양군 인구수 79,249

1944년 함양군 인구수 83,413

 

남북한시대

 

1949년 함양군 인구수 102,284

1957년 석복면을 함양면에 통합 함양읍으로 승격, 1읍 10면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함양읍, 수동면, 지곡면, 병곡면, 백전면, 유림면, 휴천면, 마천면

1967년 함양군 인구수 123,008

1984년 대구광주간 88고속도로 개통

1990년 함양군 인구수 55,014

1998년 10월 대전통영간고속도로(209.8km) 중 함양진주간(58.0km) 개통

2000년 12월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중 대전무주간(43.6km) 개통

2001년 11월 21일 수요일 오후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중 함양무주간(59.4km) 개통(대진고속도로 완전개통)

2002년 7월 2일 민선 제3대 함양군수 천사령(전경찰청치안감) 취임

2005년 4월 함양군 인구수 : 41,771명(전월말 41,843) 72명 감소. 세대수 : 17,171세대(전월말 17,150) 21세대 증가.

2005년 12월 12일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중 진주통영간(예정거리 48.8km) 개통

2006년 5월 31일 민선 제4대 함양군수 선거 이철우, 최은아 낙선, 천사령(전경찰청치안감) 재선

2006년 10월 13일 제1회 함양죽염축제(위원장 최은아) 개최

2007년 9월 8일 제2회 함양죽염축제(위원장 최은아) 가곡상림 개최

2007년 11월 30일 88올림픽고속도로 연결 현풍김천간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 전장) 준공

2007년 12월 13일 함양군산간고속도로 중 장수익산간고속도로 준공. 88올림픽고속도로 연결 담양고창간고속도로 준공.

2008년 1월말 기준 인구:40,642명, 세대:17,710세대

 

                                   고운과 인산

 

                   고운선생(孤雲先生) 천령태수편(天嶺太守篇) - 인산 김일훈 선생 어록

 

1. 삼차전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길지

천령태수(天嶺太守) 고운선생(孤雲先生)은 아(我) 동방성자(東方聖者)이시다. 조국(祖國) 만년에 업적(業跡)이 성은(聖恩)이라. 산천(山川)에 음덕(陰德)은 전국강산(全國江山)에 허다(許多)하나 제일(第一)이 함양군(咸陽郡)이라.

팔십사년(八十四年) 상원갑자(上元甲子)는 미회초(未會初)다. 삼차(三次) 전(戰)의 중대사(重大事)는 조국(祖國)의 활인(活人)이 우선(于先)이다.

불운(不運)에 대처(對處)하여 덕유산(德裕山)은 길성조림임지지(吉星照臨臨之地)이다. 무주구천동(茂州九天洞)은 설천면(雪川面)이오 무풍면(戊豊面)도 길지(吉地)이라. 충북(忠北) 영동(永東) 설천(雪川)도 길지(吉地)이다. 그러나 덕유산(德裕山) 전방(前方) 함양군(咸陽郡)은 지리산(智異山)과 반야봉(般若峰)이 있는데 북(北)으로 함양(咸陽)에 고장(庫藏)은 남고장(南庫藏)이오 북고장(北庫藏)은 서상면(西上面) 서하면(西下面)이라. 그러나 남고장(南庫藏)에 큰 힘을 얻기 위(爲)하여 천령태수(天嶺太守) 시절(時節)에 설(設)하신 성은(聖恩)은 지리산(智異山)이 청학체(靑鶴體)라. 남(南)으로 광양(光陽) 백운산(白雲山)이오 서북(西北)으로 함양(咸陽) 백운산(白雲山)이다. 삼봉산(三峰山)은 현(現) 삼봉산(三鳳山)이다. 가야산(가야山) 조씨(趙氏)는 거창(居昌) 수도(首都) 중엽(中葉)에 함양(咸陽)을 천도(遷都)하면 오대(五代) 명주(明主)의 왕사삼인(王師三人)이 탄생(誕生)하는 명산(名山) 삼봉산(三峰山)이오 천령(天嶺) 시(時)에 산명(山名)이다.

지리산(智異山)은 천왕봉(天王峰)이오 손방(巽方)에 일자문성(一字文星)으로 왕산(王山)이오 북(北)으로 천황산(天皇山)이오 천황산(天皇山) 하(下)에 왕(王)재요 왕(王)재아래 왕가평(王家坪)이 시금(時今) 개평(介坪)이라. 오대성왕(五代聖王)은 일대(一代)에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 정기(精氣)요 이대(二代)에 천황산(天皇山) 정기(精氣)요 삼대(三代)에 왕산(王山) 정기(精氣)요 사대(四代)에 왕(王)재 정기(精氣)요 오대(五代)에 왕가평(王家坪) 명당(明堂) 정기(精氣)다.

2. 함양은 청학포란형

지리산(智異山)은 일명(一名) 청학산(靑鶴山)이니 함양(咸陽)은 청학(靑鶴)이 포란형(抱卵形)이니 청학동(靑鶴洞) 학소형(鶴巢形)이라. 청학동(靑鶴洞) 학소형(鶴巢形)에 청학가족(靑鶴家族)을 위(爲)하여 유명(有名)한 남고장(南庫藏)과 북고장(北庫藏)이라 남고장(南庫藏) 청학산(靑鶴山)에 큰 정기(精氣)를 맡을 수 있도록 득수(得水) 득파(得破)에 수청룡(水靑龍)과 수백호(水白虎)요 산청룡(山靑龍)과 산백호(山白虎)라 덕유산(德裕山) 수원(水源)이 배후득(背後得)이오 지리산(智異山) 수원(水源)이 배전득(背前得)이오 좌득좌파(座得座破)는 백운산(白雲山) 수원(水源)이다.

백운산(白雲山) 수원(水源)이 함양읍(咸陽邑)을 장포(藏包)하게 하는데 고운선생(孤雲先生) 음덕(陰德)이다. 백운산(白雲山) 수목(樹木)을 신통력(神通力)으로 이식(移植)하고 하인당(下仁堂) 앞에 동진석(東鎭石)은 동해(東海)용왕의 신통력(神通力)으로 상산(霜山)(서리산)역룡(逆龍)으로 천령봉(天嶺峯)을 놓고 읍(邑)으로 들어온 돌북산(席卜山) 머리를 잘 놓고 문으로 회룡고조(回龍顧祖)하는 함양읍지(咸陽邑址)를 천하대지(天下大地)로 천작(天作)에 인작(人作)을 가(加)하니 금상첨화(錦上添花)라.

그리고 갑자년(甲子年)에 길성조림(吉星照臨)하여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 산동(山東) 점촌(点村) 백리허(百里許)에 가활만인(可活萬人)이라 하니 운봉(雲峰)에서 안의(安義)가 백리(百里)요 산청(山靑)이 백리(百里)라 백리허(百里許)에 문천(文千), 무만(武萬)이라 하니 운봉(雲峰), 함양(咸陽), 안의(安義), 산청(山淸)의 학교(學校) 선생(先生)은 만명(萬名) 이상(以上)이오 현역군(現役軍)과 예비군(豫備軍)은 만명(萬名) 이상(以上)이니 고인(古人)의 수법(數法)과 지리학(地理學)의 원리(元理)는 오차(誤差) 없음을 가(可)히 알리라.

청학산(靑鶴山)에 학소형(鶴巢形)은 득파(得破)가 백운산(白雲山) 물이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요, 운봉(雲峰) 물이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요, 덕유산(德裕山) 물이 북출남류(北出南流)하여 진주(晋州) 남강(南江)이라.

백두산(白頭山) 낙맥(落脈)이 삼천리(三千里) 향룡(向龍)에 상산(霜山)에서 역룡(逆龍)하여 회룡고조(回龍顧祖)요, 곤륜산산맥(崑崙山山脈)이 만리향룡(萬里向龍)에 동해(東海) 백두산(白頭山)이오 백두산맥(白頭山脈)이 동해향룡(東海向龍)에 태백산(太白山)이오 태백산맥(太白山脈)이 서(西)로 덕유산(德裕山)이오 덕유산맥(德裕山脈)이 역룡(逆龍) 삼백리(三百里)회룡고조(回龍顧祖)하니 천하(天下) 명당(明堂) 대지(大址) 계룡산(鷄龍山)이라.

3. 고운선생 천령태수

고운선생(孤雲先生) 천령태수(天嶺太守) 시(時)에 군민(郡民)이 시화년풍(時和年豊)하여 오곡(五穀)을 득시경(得時耕)하니 자연(自然)히 등풍확(登豊穫)이라 군민(郡民)이 태수(太守) 성덕(聖德)에 감읍(感泣)하여 제당(祭堂)을 설(設)하고 사시(四時) 치제(致祭)하나 고려조(高麗朝)에 불법(佛法)이 성(盛)하니 동방(東方) 대유(大儒)에 치성(致誠)은 연구세심(年久歲深)하여 자폐(自廢)하니 신인(神人)의 공덕(功德)을 원(遠) 후일(後日)에 기억하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는다.(不記不慕) 그러나 성덕(性德)은 신인(神人)이 재현(再現)하면 영세불망(永世不忘)하나니 차위(此謂) 덕불고(德不孤)라 필유린(必有隣)이니라.

선생(先生) 당시(當時)에 당호(唐胡)는 신라인을  멸시(蔑視)하여 나재신(羅宰臣)에게 불망지우(不忘之憂)로 함중물(函中物)의 정체(正體)를 분명(分明)히 알아바치라 하니 식음(食飮) 전폐(全廢)하고 와병(臥病)하니 나재신의 현명(賢明)한 영애(令愛)는 춘장(春丈)의 고충(苦衷)을 견딜 수 없어 노심초사(勞心焦思)하였다. 기시(其時)에 선생(先生)은 고민하는 내용(內容)을 간절(懇切)히 물으니 영애는 당호지사(唐胡之事)를 자세(仔細)히 말하니 선생(先生)은 신인(神人)이라. 즉석(卽席)에 방법(方法)을 말하니 이러하다. 단단(團團) 함중물(函中物)은 반옥반황금(半玉半黃金)이라. 야야지시조(夜夜知時鳥)로 함정미토음(含情未吐音)이라하니 당시(當時) 조야(朝野)에 명성(名聲)은 뇌진(雷震) 사해(四海)하여 당호(唐胡)의 초청(招請)에 응(應)하나 자존(自尊)이 강(强)한 호족(胡族)의 편성(偏性)에 주유천하(周遊天下)하니 우울(憂鬱)한 심정(心情)을 절구(絶句)로 달래니 가야산중 감회(感懷)에 일절(一絶)은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하니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이라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하여 고교유수진롱산(故敎流水盡聾山)이라하니 바위사이로 미친 듯이 내달려 깊은 산 울리니 지척의 이야기도 분간하기 어려워라 늘상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두려워 일부러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귀먹게 했네. 선생(先生)의 낙루지회(落淚之懷)니라.

4. 전국민이 정신무장하면 천하를 다스린다

아(我) 동방(東方)은 지역(地域)이 협소(狹小)하나 성탕(成湯)은 칠십리(七十里) 소국(小國)으로 왕천하(王天下)하고 문왕(文王)은 백리(百里) 소국(小國)으로 천하(天下) 삼분지이(三分之二)하고 성길사한은 사막(沙漠)에 기병(起兵)하여도 왕천하(王天下)하고 명호(明胡)도 변방(邊方)에서 왕천하(王天下)하고 청호(淸胡)는 변방(邊方) 미개족(未開族)이나 왕천하(王天下)하니 소국(小國)도 합심(合心)하면 분열상쟁(分裂相爭)하는 대국(大國)을 정복(征服)하나 아(我) 동방(東方)은 지방(地方) 삼천리(三千里) 대국(大國)으로 굴슬어호(屈膝於胡)하고 수욕어왜(受辱於倭)하고 계족어적(繫足於狄)하니 다른 이유가 없다(無他). 승기자(勝己者)를 염지(厭之)하고 음해지심(陰害之心)으로 자상잔해(自傷殘害)하니 부패위정(腐敗爲政)하고 부정취재(不正取財)하여 만민(萬民) 도탄(塗炭)에 독자(獨自) 향락(享樂)하니 육백년(六百年) 간(間)에 매국적(賣國賊)의 부유광사지죄(腐儒狂士之罪)니라.

※이 글은  인산선생 저서 《의약신성》의 제5편입니다.

 

              함양 대화록 - 인산 김일훈 선생 어록

 

(질문자) 아니 함양이 처음인데 약 두시간 정도, 두 시간 못 걸리네요.

(인산) 불출이요. 불출이 하는 소리지. 나이 80이 돼가지구 함양에 처음와?

(질문자) 에헤헤헤.

(인산) 못 생긴 소린 잠시 내려놔.

(질문자) 함양은 옛날 친구가...

(인산) 함양은 고운 선생님 상림이 있겠다 이 얼마나 명승지요?

(질문자) 명승지죠.

(인산) 댕길만 해요.

(질문자) 여게 그 분이 암만해도 이름 생각 안나요. 옛날 친군데. 나이 아마 제보다 서너살 위 일 것같아요. 그런데 재령 이씬데. 아마 그땐 함양에선 만석군이라 했는데.

(인산) 만석군이란 그 당시에 정병호밖엔 없어.

(질문자) 아. 재령이씨에요. 재령이씬데 함양읍인지 어디 가까운 덴지..

(인산) 그건 얼간이구. 여겐 만석꾼이 정병호거든. 정병호가 만석군의 종손이거든. 개평에 옛날 일두 종손인데 만석군이 있어요. 아직두 부자요.

(인산) 여게 글을 잘하는 이가 하씨 하춘계라구 그 율을 잘해. 작문은 시원치 않구.

(질문자) 네. 그래요?

(인산) 작문은 산청에 김하이라구, 김칠기라고 하는 양반이 있잖아요. 그가 작문은 장하구. 율은 또 할 줄 모르고. 여개 서부 경남에 큰 그릇 별루 없어요.

(질문자) 정일두 태지가 어디 있습니까?

(인산) 개평.

(질문자) 여기서 멉니까?

(인산) 멀지요.  한 20리 되요.

(질문자) 아. 멀구만요. 이 함양이 참 지리산..

(인산) 만석군이 계승해 오던 된데. 참 명승지요.

(인산) 고운 선생님이 하루 저녁에 숲을 저게서 하림까지 심어가지고 또 이 동해 용왕을 불러가지고 이 천령산 내려오는 산을 짤라 가지고 길을 돌렸어요. 그게 상상을 못할 일이지. 그런데 이 60년 전만해도 하림까지 숲이 이어 있었어요. 그땐 숲속에 개구린 역부러 잡아다 놓으면 며칠이고 고 가만히 있다가 죽어요. 그 어디 있을 수 있어요? 지금도 여개 이 숲이 그렇게 큰데 보호림이지. 문화재니까. 여개 까치고 뭐고 못들어와.

(질문자) 지금도 없어요?

(인산) 얼씬 못해요. 새가 그게 얼씬 못하지.

(질문자) 인걸은 지령이라 하더니만...

(인산) 아 그거 조화는 무궁화라.

(질문자) 함양이 피난지고 살기 좋다고..

(인산) 여기 지리학적으로 청학이 포란형이라. 이게 오대왕후지지야. 여기 왕자(王字)가 다섯이요. 요 앞에 왕산, 저 높은 게 천왕봉이고 지리산 천왕봉.

(질문자) 천왕봉이 여게 보입니까?

(인산) 맑은 날엔 보이지. 요 뒤에 천황산이고 천황산 바로 앞이 왕자(王字)야. 개평위에 올라가면 왕평이 있거든. 이거 오대왕후지지라해서 왕자(王字)가 다섯이 들어있어요. 그거 참 묘하게 되어있어요.

(질문자) 함양터가 보통이 아니군요.

(인산) 터 세가 보통 잘된 게 아니지.

(질문자) 강이, 물이 좀 적지요.

(인산) 강은 적은데 여게 보조하는 거이, 덕유산물이 저쪽으로 들어오거든. 또 이 운봉물이 앞으로 나가거든. 배후득 배전득이라. 배후에서 득수득파했거든. 이 앞에서 배전 득수득파가 있구. 본득본파가 약해도 되거든. 그래 왕후지지라.

(질문자) 과거에 인물이 많이..

(인산) 많이 났지. 그래.  그런데 지리학에 밝은 이들은 진작 갔지. 그런데 이 비결은 아직 망하게 꾸며. 운봉 지리산 청학동이라 하거든? 청학동이라 저 높은 봉 꼭대기에 올라가가지고 ..... 청학동은 백리허거든.운봉 두류산 동점촌 백리허에 청학동인데 가활 만인이라 해놓구. 비결에 비결은 잘된거지. 지리산 동점촌에 가활만인이라 했거든. 해놓고 문천 무만이라. 문장은 천명이 살구 무관은 만이 사니라. 상고시절에 얼마 안사니까 아무도 모를 소리 아니겠어요? 지금에 와서야 학교선생 여기에 천이 넘어요. 운봉부터. 안의 산청 이쪽으로돌아가면. 현역 예비군까지 무관이 얼마요? 옛날에 그게 다 무관이요. 문무를 말하는 데 지금에 와서 맞지 왜 안맞아요?  그러니까 학교선생 천이 넘구 군인이 만이 넘을 땐 여개 와서는 살 수 있다.

 

          함산 김윤수 운문

 

        상림의 노래

 

                     김윤수  작

 

신라 천년 문화 정기 사량부에 맺히어

고운선생 홀로 받아 동국문학 비조 되고

함양땅 천령군 태수 백성 위한 정치 펴

 

신라 문호 유가 신선 손수 심은 상림숲

위천수 홍수 방지 해충류 발생 금지

천년숲 천연기념물 애민정신 길이 펴

 

신라 왕실 언양 후예 죽염시조 인산선생

문향 다라 함양 살며 인술 펼친 의가 신선

사운정 사모의 노래 구세제민 포부 펴

 

             무진미술관 예찬(豫贊)

        -무진미술관 건립을 기원하며-

 

                     김윤수  작

 

심진동

찾을 심, 참 진, 골짜기 동

참을 찾아드는 골짜기

참은 무엇인가

참이치인가, 참경치인가

참이치를 찾는 이는 종교인이나 구도인

참경치를 찾는 이는 유람객이나 탐승객

그들은 참을 찾았는가?

찾은 사람은 말이 없을 테고

아직도 찾지 못한 사람이

계속 찾아드는 것인가

참이 있는가, 없는가?

참은 어디에 있는가?

심진동에 있긴 있는가?

참경치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참이치는 어찌하면 볼 수 있는가

참을 찾으나 참은 없다

참은 없으나 참없음이 있다

참없음이 거기 있다

참없음이 참인가

거기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참이치도 참경치도 아니고

참없음이다

참없음은 무엇인가

참이치도 참경치도 아니고

참예술이다

참을 찾아 심진동에 오니

참없음이 있다

참없음의 참예술이 있다

심진동에서

참예술의 참을 찾았다.

참없음의 무진 정룡 화백

파민 정덕상 부자 한국화가

무진미술관이 건립된다면

수려한 자연풍광

수월한 예술세계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심진동 용추계곡

용추국제자연예술제도 열릴

자연예술의 전당

금상첨화의 현장

심진동 용추계곡 무진미술관

 (2007.12.11 지리산문학 45집)

 

    시선 이태백의 시

   
                               김윤수 번역
 

     月下獨酌      달빛 아래 홀로 음주

 

三月咸陽城   삼월 달 함양성에

千花晝如錦   온갖 꽃 만발한데

誰能春獨愁   뉘 홀로 시름겹나

對此徑須飮   그러니 마셔댈밖에

 

    送趙雲卿      조운경과 작별

 

白玉一杯酒   백옥 잔으로 술 한 잔

綠楊三月時   버들 푸른 삼월 달에

春風餘幾日   봄바람 남은 날 얼마일까

兩鬢各成絲   양쪽 귀밑머리 다 하얗네

秉燭唯須飮   촛불 밝혀두고 마셔댈지니

投竿也未遲   낚싯대 드리움도 늦지 않으이

如逢渭川獵   위천에서 문왕을 만난다면

猶可帝王師   제왕의 스승도 됨직하이

 

    上皇西巡南京歌      당명황의 남경 피난

 

濯錦淸江萬里流   맑은 금강은 만리에 흐르는데

雲帆龍舸下揚州   임금님의 배 양주로 내려갔네

北地雖誇上林苑   북쪽 땅에선 상림원을 자랑하지만

南京還有散花樓   남경에는 오히려 산화루가 있구나

 

    奔亡道中      피난길에

 

函谷如玉關   함곡관은 옥문관 같으니

幾時可生還   언제쯤 살아 돌아올꺼나

洛陽爲易水   낙수는 역수로 변하고

嵩嶽是燕山   숭산은 연산이 되었네

俗變羌胡語   세속에는 오랑캐 말씨

人多沙塞顔   사람들은 변방의 몰골

申包惟慟哭   신포서의 구원병 요청 통곡

七日鬢毛斑   이레만에 귀밑머리 하얘졌네

 

     集句中譯詩(李殷相, 金素月 詩句: 金首侖 集譯)

 

    歡樂谷                            환락곡                  

 

懷之懷之 尋而來之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懷中之汝 未有見之   그리운 그녀는 아니 뵈네

丈夫之胸 宜其忘之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三年之情 不能忘之   15년 정분을 못 잊겠네

汝之胸中 旣有我矣   너의 가슴엔 내가

我之胸中 旣有汝矣   내 가슴속엔 네가 있어

只持此矣 宜其回去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胸中一言 終不盡之   심중에 남아있는 말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天地之間 廣漠無邊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歲月旣流 不用揆之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心無所住 望遠天邊   마음은 어디로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懷之懷之 尋而來之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歡樂谷上 共步路邊   함께 걷던 언덕길을

終日徘徊 彷徨而去   진종일 헤매다 가네